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폐기된 법안이 1만5,000여건에 달한다. 이 중에는 법안이 통과될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지만,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처럼 많은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는 이유는 이해당자들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이다. 일부 법안은 이해당사자들의 물밑 로비로 논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폐기되기 일쑤다. <시사위크>는 국회에 계류된 법안이 왜 처리되지 못했는지 그 과정을 쫓고자 한다. 법안이 발의된 배경과 국회에서 왜 잠만 자야 하는지를 추적했다. [편집자 주]

정치권에서 주취감경의 근거인 형법 제10조와 관련해 개정 노력이 있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법 제도 자체보다는 적용의 문제라는 지적도 있으며, 최근 판결 경향은 세간의 인식과 다르다는 언급도 있었다. / 게티이미지뱅크
정치권에서 주취감경의 근거인 형법 제10조와 관련해 개정 노력이 있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법 제도 자체보다는 적용의 문제라는 지적도 있으며, 최근 판결 경향은 세간의 인식과 다르다는 언급도 있었다. / 게티이미지뱅크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술에 취한 채 범죄를 저지른 경우 낮은 형량을 선고하는 ‘주취감경’(주취감형)은 몇 차례 사회적 공분을 산 바 있다. ‘조두순 사건’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에 주취감경 폐지를 두고 찬반 논쟁이 10년 넘게 이어졌지만, 형법 제10조와 관련한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대법원과 법무부가 2008년 각각 연구용역을 발주해 아동성폭력 가해자 등에 대한 주취감경 문제를 지적하는 보고서를 냈지만 폐지에 이르지 못했다. 또 지난해 8월 법무부도 주취감경과 관련해 연구용역을 발주했지만, 폐지를 공론의 장에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만큼 해묵은 논란이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는 셈이다. 

◇ 엇갈리는 국민 정서와 법조계의 시선

사회적으로는 주취감경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편이다. 일각에서는 음주나 약물을 복용한 상태로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가중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범죄를 저지를 의도를 갖고’ 음주나 약물을 이용해 자의적으로 심신상실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청와대 국민청원’에 ‘주취감경 폐지’ 청원이 올라간 이후,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음주감형제도 폐지’와 관련해 찬반여론을 조사한 바 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폐지 찬성은 85.0%로 나타났다. ‘음주감형제도 폐지’에 반대한다는 의견은 13.8%였고, 모름·무응답은 1.2%였다. 국민의 법감정은 주취감경을 폐지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반면 법조계는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에서 나온 법안 대부분은 형법의 ‘책임주의’ 원칙에 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에 형법의 대원칙을 훼손하지 않도록 논의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는 게 법조계의 의견이다.  

아울러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20조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 19조로 인해 형법의 감경규정을 배제하는 특례가 있음에도, 정치권에서 발의된 개정안은 법관의 재량 여지를 배제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결국 양측 입장이 팽팽하기 때문에 그간 법안 개정이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형법 체계를 고려할 경우 정치권에서 발의된 법안이 그대로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 또 최근의 판결 경향은 사실상 폐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형법 체계를 고려할 경우 정치권에서 발의된 법안이 그대로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 또 최근의 판결 경향은 사실상 폐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 발의된 법안, 그대로 통과 어려워

결론적으로 현재 형법 체계를 고려할 경우 정치권에서 발의된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국민의 법감정과 형법 체계와의 간극을 좁힐 절충안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현재의 법 제도와 최근 판결 추세를 설명하며, 사실상 폐지 수순으로 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우선 전문가들은 형법 10조2항이 지난 2018년 12월 '심신장애로 인하여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에서 '감경할 수 있다'로 바뀌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감경을 해야 한다’는 의무에 가까운 의미였는데, ‘감경할 수 있다’는 재량권을 좀 더 보강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판사가 범죄행위의 경중과 상황 등 전반적으로 고려해 양형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이 때문인지 최근에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만취’ 정도로는 감경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사기관과 법원 모두 주취상태의 범죄행위일지라도 행위 당시의 의사결정능력 등을 고려해 심신미약 감경규정 적용을 자제해왔다는 것이다. 사실상 ‘스스로 만취해’ 범죄를 저지를 경우, 법원이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게 법조계 인사의 전언이었다. 

실제로 2018년 발간된 '한국심리학회지 : 법' 제9권에 실린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법원의 책임능력 판단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6년 사이에 1심에서 피고인 측이 심신장애를 주장한 사례는 1,597건이 있는데, 법원은 이중 305건을 인정했다. 비율로 따지면 19% 정도다. 

또 ‘심신미약’에 대한 규정의 세밀함과 심신장애자 판정을 위한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이는 형법 제10조가 음주 상태로 인한 심신장애자를 위해 만들어 진 게 아니라, 정신질환 등의 사유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정신병적인 기질적 요인과 단순한 심리적 스트레스로 발생하는 사건, 그리고 주취 범죄에 대한 개별적 적용이 필요하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다만 익명을 요구한 형사소송 전문 변호사는 “주취감경이 논란 됐던 사례들은 주로 법원의 판결이 국민 정서와 맞지 않았던 것들”이라면서 “(형법)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법 적용상의 문제로 보는 게 타당하다. 국민 전반적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법원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근거자료 및 출처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9조
  법제처-국가법령정보센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 제20조
  법제처-국가법령정보센터
한국사회여론연구소 - 2017년 12월 정례조사
2017. 12. 10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정신장애 범죄자에 대한 법원의 책임능력 판단에 대한 연구’
2018 한국심리학회지 : 법 / K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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