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폐기된 법안이 1만5,000여건에 달한다. 이 중에는 법안이 통과될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지만,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처럼 많은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는 이유는 이해당자들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이다. 일부 법안은 이해당사자들의 물밑 로비로 논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폐기되기 일쑤다. <시사위크>는 국회에 계류된 법안이 왜 처리되지 못했는지 그 과정을 쫓고자 한다. 법안이 발의된 배경과 국회에서 왜 잠만 자야 하는지를 추적했다. [편집자 주]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감형하는 '주취감경'은 종종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심신장애자에게 감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형법 제10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본 이미지는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 게티이미지뱅크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감형하는 '주취감경'은 종종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심신장애자에게 감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형법 제10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본 이미지는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 게티이미지뱅크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지난해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로스쿨’ 에피소드를 보면, 술에 취해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감경해주는 장면이 있다. 당시 판결을 내리던 판사는 심신미약(만취)으로 낮은 형량을 선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후 해당 성범죄자의 이름을 딴 법안(심신미약을 인정한다→판사의 재량으로 감경할 수 있다로 변경)이 만들어졌다는 언급이 나온다.

해당 에피소드를 보면 한 사건이 떠오른다. 2009년 사회를 공분케 한 ‘조두순 사건’이다. 미성년자인 피해자는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피해를 입었으나, 가해자는 저지른 범죄에 비해 낮은 형량을 받았다는 여론이 대세였다. 당시 형량 감경 사유는 ‘심신미약’이었다. 조두순이 범행 당시 술을 마셨고,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게 그 이유다. 

◇ 심신미약 감경, 주취감경이 아니다 

사회적 통념과는 다르게 법률에서 정의하는 ‘심신미약’은 만취 상태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형법 제10조 2항은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심신미약에는 신경쇠약 등에 의한 일시적인 것과 알코올 중독·노쇠 등에 의한 계속적인 것으로 나눈다.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은 당사자가 불법임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를 말한다. ‘의사를 결정할 능력’은 불법을 판단해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판단한다는 의미다. 

즉 심신미약 감경은 ‘심신장애로 인해 불법임을 인지할 능력이 없으며,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자’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심신미약자는 한정책임능력자, 법률상 책임능력이 제한돼 있는 상태로 판단한다. 

하지만 심신미약이 이슈가 될 때마다 술과 연관됐기 때문에, 주취감경이 공분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조두순 사건’ 뿐 아니라 음주운전 사망 사건이나 술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는 등의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이번에도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사실 ‘조두순 사건’ 이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는 감경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는 특례법 제20조인데,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에서 성폭력범죄를 범한 때에는 형법 제10조 제1항·제2항 및 제11조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즉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일 때 저지른 성범죄에 한해서는 법관의 재량으로 심신미약 감경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20년 6월 형법 제10조에 4항을 신설해 음주·약물로 인한 심신장애자의 행위에는 10조 2항을 적용하지 않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 뉴시스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20년 6월 형법 제10조에 4항을 신설해 음주·약물로 인한 심신장애자의 행위에는 10조 2항을 적용하지 않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 뉴시스

◇ ‘형법 10조’ 개정 목소리 지속

사회 일각에서는 만취 상태 범죄에 대해 엄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술을 마셔 기억나지 않는다’고 버티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주 범죄에 더 무거운 책임을 지워야 한다” “한국은 술에 너무 관대하다” “술을 마시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등 형법 제10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자의로 음주·약물을 복용해 심신장애 상태가 된 경우 감형을 받지 않도록 하는 개정안이 발의된 바 있다. 자의적으로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지를 경우 가중 처벌하는 개정안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모두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형법 제10조에 4항을 신설해 음주·약물로 인한 심신장애자의 행위에는 10조 2항을 적용하지 않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서 의원은 “주취상태와 약물로 인한 범죄의 경우 본인의 의지로 충분히 사전에 자제가 가능한 점을 감안할 때, 이로 인해 형을 감형하는 것은 국민정서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해당 법안은 2020년 6월 8일 발의돼 현재 상임위 계류 중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도 “스스로 야기한 것에는 감형을 해주면 안 된다” “주류 섭취 이후 심신장애가 발생해 범죄를 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음주를 해 범죄가 일어났으면 당사자에게 책임을 온전히 물어야 한다” “주취 상태는 본인이 초래한 것이라 악용할 여지가 있다”며 법안 개정에 찬성하는 의견이 나온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에 대해서는 윤석열 대통령도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윤석열 정부 120대 국정과제에는 ‘주취감경 폐지’가 들어 있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도 “주취범죄를 양형 감경 요소에서 제외하고 음주범죄 무관용 원칙을 적용한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에 법무부는 지난 8월 주취감경 폐지를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음주로 인한 주취감경의 해외 입법례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주취감경 폐지를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한지 검토하기 위해서다. 법무부는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법 개정이 필요하다면 정부 입법으로 할지, 의원 입법으로 할지 판단할 방침이라고 했다. 

다만 법안이 실제로 개정될지는 미지수다. 해당 법안은 늘 첨예한 논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윤석열 정부가 어떤 의지를 갖고 추진할지 지켜봐야 한다. 

 

근거자료 및 출처
형법 제10조 
  국가법령정보센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0조
  국가법령정보센터
형법 일부개정법률안(형법 제10조) / 서영교 의원 대표발의 
2020. 6. 8 의안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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