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북한학 박사

북한의 관영 선전매체에는 살인·강도나 화재, 교통사고 소식 등은 실리지 않는다. 조선중앙TV나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정이나 교시가 헤드라인으로 등장하고 정치선전·선동이나 경제성과를 보여줄 뿐이다. 이것만 봐서는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그나마 김정은 위원장 체제 들어 홍수와 태풍 등 재난 관련 피해상황은 간헐적으로 보도된다. 지난 7월 말 북중 접경지대인 압록강 유역에서 집중호우로 인해 가옥이 침수되고 도로와 농지가 잠기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북한 TV와 신문은 이를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다.

물론 여기에도 숨은 의도가 깔려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즉각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도록 헬기를 투입해 위기에 처했던 많은 사람들이 구조됐다는 이른바 ‘인민사랑’의 리더십을 치켜세우기 위한 것이다. 북한은 당시 평북 신의주 등에서 4,200여명의 주민이 목숨을 구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곳뿐 아니라 양강도와 자강도 등 압록강 상류지역에서 산사태 등으로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한미 정보 당국은 대북감시 위성 등을 통해 파악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신경 써서 챙긴 대목만 부각하고 나머지 피해나 재난상황은 감춰버리는 것이다.

안팎으로 부정적으로 비춰질 범죄행위나 반체제 움직임 등은 철저하게 통제되는 채널을 통해 전해진다. 주민들 사이에서 ‘제3방송’으로 불리는 유선매체다. 사상교양과 통제를 위해 가동되는 이 라인은 공중파인 조선중앙TV와 달리 어떤 내용인지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는다. 내부 관계자를 통해서나 위험을 감수하고 외부로 유출하는 경우에 극히 예외적으로 알려질 뿐이다.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즐겼다는 이유로 중고등학생들에게 잇달아 징역형이 부과되는 공개재판 장면이 전해져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판 한류에 격노해 4년 전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엔 단순한 드라마·영화 시청만으로도 노동교화형(징역) 5~15년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어린 학생들을 삭발시킨 뒤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형을 내리는 장면을 틀어대면서 “이 자들의 인생은 이제 파탄났다. 괴뢰문화에 빠져 범죄자의 길로 접어든 자들의 비참한 말로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젊은 세대들의 체제이반으로 흔들리는 김정은 위원장 체제의 현주소다.

북한TV와 노동신문에도 사건·사고가 실리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화재나 선박 조난, 광산의 갱도 붕괴 등이 대표적인데, 여기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수령 결사옹위’라는 메시지다.

예를 들면 가정집이나 공공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불길 속에 뛰어들어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를 구하려다 숨졌다는 스토리다. 또 어로작업을 나갔던 선박이 태풍을 만나 침몰하려 하자 선실의 초상화를 비닐로 감싼 뒤 몸에 묶어 지키려다 사망했다는 줄거리도 등장한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북한에서는 이를 영웅시하며 연일 띄우기에 나선다.

이런 모습들은 개인의 권리나 인간의 존엄성보다 수령과 집단에 대한 충실성을 절대시하는 북한 체제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사람 목숨보다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더 중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리 없다. 젊은 청년들을 러시아 용병으로 파견해 희생시킨다는 외부세계의 비판에 김정은 위원장과 노동당·군부의 핵심층이 눈감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얼마 전 군사분계선(MDL) 북측 지역에서 벌어진 송전탑 붕괴 사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과거 개성공단 가동 당시 우리 측 전력을 공단에 제공하기 위해 세워진 송전탑을 철거하려 탑 위에 올라간 군인 등 철거인력이 갑자기 기울기 시작한 송전탑 위에서 그대로 추락하는 끔찍한 장면이 대북 감시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수백 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대형 송전탑의 경우 전력케이블 무게만 해도 엄청난데 한쪽을 먼저 잘라버리는 바람에 반대쪽으로 하중이 쏠리는 걸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구조물에 대한 이해나 안전, 공사인력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만 있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다. 초고압 송전탑에 아무런 안전장비도 없이 올라갔다는 게 우리 군 당국의 설명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이 이처럼 무리수를 둔 건 김정은 위원장의 강요와 재촉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한국을 제1의 적대국이라고 주장하며 대남 적대노선을 밝힌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관계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를 잇달아 취했다.

휴전선 지역에 콘크리트 장벽 형태의 구조물을 설치한 것도 모자라 남북 간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에 폭발물을 터트려 큰 웅덩이를 만드는 형태로 차단막을 치는 쇼를 벌였다. 비무장지대(DMZ)에는 새로 지뢰를 매설하는 작업도 강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뢰가 터져 사상자가 발생한 정황이 우리 측 감시 장비에 포착되기도 했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을 소위 ‘최고존엄’이라 부르며 절대시한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식의 논리가 횡행한다. 과거 북한이 남북회담장에서 김정은 위원장 비판 대북전단을 문제 삼으려 최고존엄 운운하는 선전을 늘어놓자 우리 측 한 인사는 “귀측에 한 명의 최고존엄이 있다면 우리는 5,000만의 최고존엄이 있다”는 말로 맞대응했다.

한 명의 최고지도자나 수령이 2,500만명 주민의 생사와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북한 체제와 달리 국민 하나하나가 존엄성을 가진 존재임을 알린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지도부가 ‘유일지배’나 ‘수령론’의 망령에서 벗어나 인간존중, 생명존중의 보편적 가치에 무게를 싣는 환골탈태의 결단을 내리기를 기대해 본다. 

키워드

#북한 #김정은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