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 박사
김여정은 북한 노동당 부부장 직함을 달고 있다. 어린 시절 스위스 유학을 함께 한 오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후광 덕에 36살 나이에 차관급 자리에 앉은 것이다.
한때 김정은 위원장에 이어 평양 세습권력의 2인자 자리를 굳힌 듯하던 김여정 부부장은 근래 들어 쓴맛을 봤다. 김정은 위원장이 딸 주애를 후계자로 내세우는 행보를 보이면서 뒷전으로 밀려나 존재감이 없어진 것.
김정은 위원장과 주애가 센터를 차지한 관영매체의 공개행사 사진엔 김여정 부부장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20~30장의 장면 속에 마지못해 1~2장 등장하지만 모퉁이에 겨우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도 핸드폰을 보며 딴전을 피우거나 실무 간부와 수다를 떠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던 김여정 부부장이 오랜만에 목소리를 냈다. 오빠의 ‘입’ 역할을 자처해온 그가 한국과 미국을 향해 비난 포문을 연 것이다.
사실 북한은 한국에 대해 그동안 말을 아껴왔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초 한국을 ‘제1주적’으로 규정하며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내세우는 대남 적대노선을 설정하면서다. 사정이 이렇게 되다 보니 대남비난 등도 사라지는 남북관계의 진공상태를 맞았다. 지난 대선에서 북한은 특정 후보에 대한 비방이나 낙선·당선을 유도하는 선전·선동도 하지 않았다. 대선 결과도 짤막하게 전한 게 전부였다.
김여정 부부장의 대남 비난 담화는 이재명 정부 출범 54일째인 지난 7월 28일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 나왔다. 그는 당 부부장 담화에서 이재명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고 “한국과 마주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며 차단벽을 쳤다.
특히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하는 방안이 추진되는 것과 관련해서도 “헛된 망상을 키우고 있다”며 선을 그었다.
대남비난 하루 뒤에는 워싱턴을 겨냥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가 이어졌다. ‘조미 접촉 사이의 접촉은 미국의 희망일 뿐’이란 제목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접근에 대한 북한의 불편한 심기가 읽혀진다.
담화에서 김여정 부부장은 백악관 안팎에서 김정은 위원장과의 대화에 열려있다는 입장이 흘러나오고 있다면서 “지금 2025년은 2018년이나 2019년이 아니라는 데 대해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잇달아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됐던 점을 되짚은 것이다.
이는 그 사이 북한이 ‘핵 보유국’으로 자리했다는 점을 주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트럼프 1기 정상회담이 북한의 핵 시설을 동결하는 등의 비핵화 협상 성격을 띠었다면 향후 회담은 북핵을 인정하는 테이블이 돼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른바 군축협상이다.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이 미국에 대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김여정 부부장은 담화에서 “나는 우리 국가수반과 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우회적 어투를 즐기는 김여정 부부장의 화법이다.
그러면서 “조미 수뇌들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비핵화 실현 목적과 한 선상에 놓이게 된다면 그것은 대방(상대방)에 대한 우롱으로밖에 달리 해석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김정은-트럼프 관계가 좋다고 해서 그걸 내세워 비핵화 테이블에 북을 끌어들이려 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재명 정부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내면서 날카롭게 대남비난의 각을 세운 것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복합적이다. 어쩌면 한국을 배제한 채 워싱턴을 향해 달려가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 듯하다. 일정한 조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김정은-트럼프의 브로맨스를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 그렇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과거 트럼프 대통령과 주고받은 친서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따돌리려 집요한 요구를 했던 점과 연장선상에 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파국을 맞은 뒤 김정은 위원장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진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거나 “삶은 소대가리” 등의 거친 비방을 퍼부은 앙금이 여전한 때문인 듯하다.
집권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보여 온 대남·대미 인식이나 협상행보는 나무를 보면서도 숲을 조망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마치 전투에는 능하면서도 전쟁에서는 스스로의 입지를 조금씩 좁혀가는 모양새였다.
최고지도자에 오른 뒤부터 핵과 미사일 도발에 집착하면서 대북제재를 자초했고 결국 국제사회에서 고립은 심화됐다. 무엇보다 북한 경제가 총체적 위기에 처하면서 그가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주민에게 약속한 것이 공수표가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화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밀착을 통한 생존을 모색하고 있지만 불법 침공에 대한 병력·무기지원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비롯한 서방 국가와 대립이 격화됐다. 북중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도 관심거리다.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는 그 언술체계만 보면 부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보이지만 행간에서는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향해 다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는 점이 읽혀진다. 이재명 정부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 표시를 자신들의 요구나 기대사항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이재명 정부는 그 어느 시기보다 초기부터 적극적인 대북 유화책을 선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지난 1월 취임사에서 ‘북한 핵 능력’과 김정은 위원장이 원산 갈마반도에 지은 해양리조트에 관심을 드러내면서 전향적인 기조를 풍기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5년의 임기를 막 시작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4년 임기 중 반년을 보냈다. 두 사람 모두 단임으로 마쳐야하기 때문에 이재명-트럼프 조합의 현 한미 시스템은 현실적으로 3년 남짓한 기간이 남아있다.
북한 체제가 당면한 이런저런 안팎의 문제를 고려할 때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이 지금처럼 머뭇거리며 신경전이나 벌이고 있을 시간은 없어 보인다. 보수나 진보나 다 똑같다는 식의 불만에 사로잡혀 분노만 키울 게 아니라 지금은 ‘보수든 진보든 일단 밀고 나가보자’는 정신이 필요하다. 쥐를 잡는데 흰고양이 검은고양이를 가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의기투합도 마찬가지다. 김정은-트럼프의 친분관계는 다시는 오지 않을 절체절명의 기회일 수 있다. 더욱이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과 정부가 대북노선에서 지금과 같은 일치된 2인3각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한국 탓, 미국 탓, 세상 탓하며 타발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마지막 탱고를 춘다는 결연한 심정으로 비핵화 협상과 체제생존을 위한 남북 협력의 길에 나설 것을 김정은 위원장에 촉구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