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민지 기자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당했을 때,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기본은 증거를 수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아동‧노인‧중증 장애인이 학대 피해 현장에서 증거를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보호자가 학대 피해 입증을 위해 불법 논란 속에서도 ‘녹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5월 경기도 용인의 한 장애아동을 둔 부모가 달라진 자녀의 태도에 학교 교사로부터의 언어적 학대를 직감하고 자녀의 책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녹음파일을 확보했지만, 해당 녹음파일이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해 증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현재 ‘통신비밀보호법’은 대화에 참여한 당사자가 아닌 자의 녹음을 아무런 예외규정 없이 금지하며, 이를 위반한 녹음자료는 재판 또는 징계절차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녹음파일에는 “버릇이 매우 고약하다. 아휴 싫어. 싫어죽겠어. 너 싫다고. 나도 너 싫어. 정말 싫어” 등 아동의 정서를 해칠 수 있는 발언이 담겨있었으나, 증거로 인정받지 못함에 따라 2심 재판에서 결국 가해자인 교사는 무죄 판정을 받게 됐다.
이는 단순히 장애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인병원 치매 노인 학대 △시설 내 장애인 학대△ 어린이집‧유치원 내 유아 학대 등에서 피해자의 생존을 위한 녹음이 증거능력을 부정당해 가해자 처벌이 무산되는 경우가 현장에서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2일 국회에서는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 주최로 ‘학대피해 아동‧노인‧중증장애인의 권리구제 문제 진단을 위한 간담회’가 개최됐다.
이날 첫 번째 주제발표를 맡은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차성안 교수는 “장애아동에 대한 학대를 입증하고자 제3자가 녹음을 해도, 통신비밀보호법으로 인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과도한 처벌이며 예외 규정이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대정황을 의심한 장애학생의 부모가 특수학교 교실에서 교사의 발언을 녹음할 때 발생되는 증거능력 판단의 문제는 장애학생의 특수학급에서의 수업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위 사건에 관한 상고심의 대법원 판결의 결론과 법리는 신중하게 내려질 필요가 있다. 이는 앞으로 장애인‧아동‧노인에 관한 학대 행위에 관한 보호자 측의 대응과 수사‧처벌은 물론 그 예방조치로서의 비밀녹음의 가능성과도 관련해 폭넓은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발표를 맡은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는 “학대 피해에 취약한 집단을 보호하고자 제3자가 학대 상황을 녹음하더라도 바늘구멍도 못 들어가는 통신비밀보호법 조항으로 인해 증거로써 제출하지 못해 학대 입증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며 “그간의 판례에서는 제대로 된 기준이 없어 중구난방으로 결론이 나왔기에 법의 판단에 기대기보다는, 빠른 시일 내에 입법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CCTV로 충분하지 않냐’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CCTV는 음성이 들어가지 않는다”라며 “실제로 장난치는 장면이 학대로 기소됐다가 어려운 몇 년의 과정을 거쳐서 혐의가 벗겨지는 과정을 봤다. 신빙성 높은 증거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는 것에 대해 빠른 시일 내에 해결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장 경험이 있는 토론자들은 학대의 증거로 녹음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다.
경기북부노인보호전문기관 학대사례판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이주형 변호사는 “학대사례 판정을 하면서 제일 어려운 학대 유형이 정서적 학대였다. 경제적 학대는 자료 분석으로 확인이 가능하고, 신체적 학대는 CCTV로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요양원에 설치된 CCTV에는 음성이 없다”며 “요양원뿐 아니라 아동 및 장애인 보호시설에 음성 녹음 되는 CCTV 설치를 의무화 시키면 정서적 학대의 증거를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또한 실제 CCTV 설치되기 전에 비해 요양원에서 신체 학대가 상당히 줄어들어서 음성이 녹음된다는 것이 인식되면 정서학대에 대한 부분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진근석 강남구청 가족정책과 아동학대전담공무원 역시 “10세 미만 아동의 경우 진술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고 학대 피해를 입증할 증거 확보가 어렵다. 또 아동이 피해 기억이 정확하지 않거나 시간이 지나 잊어버리는 등 진술번복이 있는 경우 실체적 진실 발견으로 가해자 처벌이 어려워지고 있다”며 “당사자가 포함된 대화의 녹음은 불법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상 10세 미만의 아동이 이런 법을 알기 쉽지 않다. 또 대부분 피해아동의 비가해보호자 즉 제3자에 의한 수집증거로 제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김예지 의원은 “아동뿐 아니라 장애인, 노인 등 스스로 학대를 파악하고 자기방어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억울함 없이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간담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입법적 방안을 마련해 제도 개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