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어디선가 읽었던 “아프기 전과 후의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기억나는군. 그땐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 하지만 꽤 오랫동안 고약한 ‘허리병’(허리디스크 탈출, 척추관협착증, 척추전방전위증)으로 고생하고 나니 이젠 좀 알 것 같네. 제대로 서지도, 눕지도, 걷지도, 앉지도 못하면서 아프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나 역시 노인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거든. 그래서 이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이웃 노인들의 행동을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진짜 노인이 된 거야.

“이번에 이렇게 아프고 보니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노인을 몰랐나 싶더라고요. 내 몸 건강할 때는 깔끔하게 안 다니는 노인들을 보면 속으로 흉을 좀 봤어요.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머리도 단정하게 하고 옷도 깨끗하게 입을 건데 왜 저럴까 싶어서. 그런데 아니에요. 어깨랑 무릎이 아프니까 나 혼자서는 머리도 못 감고 세수도 겨우 할 수 있어요. 옷 입는 것도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한 세월이 걸려요. 그러니까 내가 속으로 나무랐던 그 노인들도 몸이 아파서 그랬을 수 있겠구나. 기력이 떨어지면 머리에 물을 적시는 것도 보통 노력이 아니구나. 그걸 내 나이 여든에야 깨달았어요. 노인도 노인 마음을 다 모르는 거지요.”

30대 후반의 여성 작가인 김달님의 신간 『뜻밖의 우정』에서 인용한 글일세. 윤자라는 여든 살 할머니가 쓴 감사 일기의 한 부분이지. 이 할머니도 나처럼 자신이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군. 마음이 젊고, 혼자서도 잘 걷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 아직 노인은 멀었다고 생각한 거야. 하지만 1년 전에 회전근개 파열로 극심한 어깨 통증을 겪고 나서는 자신도 노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네.

육신이 아직 건강해서 교만했던 6개월 전이었으면 그냥 웃으면서 지나쳤을 글일세. 나 역시 나이는 이미 노인이면서도 노인처럼 살고 싶지 않았고, 다른 노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그래서 몸이 아프면 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변하고, 왜 다른 사람의 애정과 돌봄 노동이 필요한지 몰랐어. 하지만 내가 아프니 알겠더군.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없고, 늙고 병들면 다 비슷해진다는 것을. 지금 눈에 거슬리는 노인의 행동들이 머지않은 미래의 내 모습이란 것도. 그래서 이제는 큰 소리로 전화하거나 떠드는 노인들을 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네. 어쩌면 지금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늙으면 청각 노화로 잘 들리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니까.

지난 여섯 달 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새삼스럽게 깨우친 게 많아. 그 가운데 하나가 의자의 고마움이야. 아프기 전에는 동네 골목 여기저기 놓여 있는 많은 의자들 보면서 누가 저런 데 앉아서 쉬는지 궁금했네. 대부분 깨끗하지 않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들이었거든.

하지만 ‘허리병’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알았네. 길에서 만나는 것 중 의자만큼 고마운 게 없다는 것을… 다리가 찌릿찌릿 저리고 엉덩이가 아파서 땅에서 발을 떼기 힘들 때는 나도 모르게 앉을 곳을 찾게 되더군. 고통이 심할 때 의자가 보이지 않으면 시멘트 바닥에라도 그냥 앉고 싶었어. 체면? 아파 죽겠는데 무슨 체면. 발병 초기에는 기어서 화장실도 다녔는데 뭘….

아프기 전에는 노인들에게 왜 의자가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네. 그래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들이 자리 욕심을 내는 걸 추태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아파보니 그게 아니야. 누구나 허리가 아프거나 늙어서 다리에 힘이 없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어. 어디든 앉아야 해. 체면 같은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지.

6개월 동안 아프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네. 아프면 물론 자기 세계가 작아지고 일상도 망가지지만, 꼭 부정적인 일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야. 몸의 의지에 따라 살아야 하는 노인이 되었다는 게 슬프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서 이제는 절대 몸을 혹사하지 않을 걸세. 무엇보다도 먼저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살 거야. “당신이 살아 있는 한, 계속 사는 법을 배우라”라고 세네카(Seneca)가 말했지. 옳은 말일세.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제대로 살다 가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계속 배워야 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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