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제주 4·3이라는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한란’은 사건 자체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감정과 삶의 순간들을 따라간다. 배우 김향기는 그 중심에 선 인물 아진을 연기한다. 모녀의 생존을 위한 여정 속에서 흔들리고 버티고 다시 나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내며 진한 울림을 안긴다.
김향기의 호연으로 완성된 ‘한란’은 1948년 제주를 배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산과 바다를 건넌 모녀의 강인한 생존 여정을 담은 영화다. 첫 장편 데뷔작 ‘그녀의 취미생활’로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관왕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받은 하명미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아 섬세한 서사와 잊지 말아야 할 1948년 제주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묵직하게 펼쳐낸다.
‘한산: 용의 출현’(2022) 이후 3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김향기는 제주 해녀 아진을 연기했다. 아진은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피신하던 중 마을이 습격받았다는 말을 듣고 여섯 살 어린 딸 해생(김민채 분)을 귀하기 위해 하산을 하는 강인한 모성애를 지닌 엄마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딸을 구하기 위해 어떠한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1948년 제주의 여성이자 엄마로 변신한 김향기는 완벽에 가까운 제주어 구사부터 딸을 구하기 위해 산과 바다를 건너는 아진의 생존 여정 한 장면 한 장면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완성해 호평을 얻고 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김향기를 만나 ‘한란’과 함께한 순간들에 대해 들어봤다.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너무 좋았다. 배우로서 캐릭터나 장르적으로 욕심나는 부분이 있는 작품이 있어도 글이 잘 안 넘어가면 선택하기가 참 어렵고 고민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지점에 있어서 ‘한란’은 텍스트로 처음 접했을 때 너무 잘 읽혔고 상상이 많이 되기도 했다. 모녀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비추려고 하는 지점들이 있는 시나리오라는 게 느껴져서 선택하게 됐다.”
-4·3이라는 무거운 사건을 다루는 만큼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다.
“시나리오 때문에 선택을 한 입장이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다루는 작품으로 보기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도 사람들의 모습, ‘어땠을까’에 대한 것이다. 감정적인 부분들을 많이 드러내려고 이야기를 했고 그 힘든 과정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그 부분에 더 집중했다. 또 배우로서 한 사람을 연기하는 지점에 있어서 너무 많은 것들을 머릿속에 두고 현장에 가는 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담을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시작하는 단계에서 감독님께서 첫 만남부터 3시간 동안 설명을 다 해주셔서 믿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예술 매체가 전체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보니까, ‘한란’도 큰 흐름 속에서의 한 지점을 다루고 있고 그 지점 속에서 어떠한 인물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촬영 전 어떤 조사와 준비를 했나.
“일단 영화 ‘지슬’(2013)을 봤고 감독님께서 준 책을 참고한 부분이 있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촬영할 장소에 미리 가서 다니기도 했다. 다니면서 정보도 얻고 공부 겸 현장 답사 느낌으로 다녔다. 4·3연구소에서 낸 책 중 할머님들의 증언이 나와 있는 책이 있었는데 감정적으로 크게 와닿았다. 괴로웠지만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보면서 상상하다 보니 그 부분이 크게 와닿았다.”
-감독이 연기적으로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그냥 나를 믿어주셨던 것 같다. ‘한란’이 공개되고 나서 어머니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 놀라는 분들이 많았잖나. 그런데 나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촬영 마지막 끝까지 내가 어머니로서의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거든. 이 이야기에 그냥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의, 내 또래의 어머니였던 것은 맞지만 특별히 엄마 역할에 대한 의식은 하지 않았다. 감독님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한 번도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정말 이야기 속 인물로서 다가가자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제일 큰 고민은 제주어였는데 실제로 감독님이 제주 생활을 오래 하면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현장에서 촬영하면서 감독님이 해준 말이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감독님이 해주신 이야기들이 도움이 많이 됐다.”
-제주어 연습 과정도 궁금하다.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제주어는 감수자분과 함께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줘서 작품 들어가기 몇 달 전에 일대일 과외처럼 수업을 했고 그 과정에서 녹음을 해서 차량이나 이동 중간중간에 많이 들으면서 연습을 했다. 현장에서도 제주어가 지역마다 다른 부분이 있다 보니까 제주도 배우들과 함께 토론을 하면서 한 지점도 있다. 처음에는 엄청 어려웠다. 감 잡는 게 너무 어려웠다. 작품 자체가 굉장히 현장감이 있는 장면들이 많고 액션적인 부분들도 많고 동작을 계속하면서 걸으면서 하는 게 많은데 억양을 따라 하려고 하니까 스스로 너무 어색한 거다. 그 감을 잡는 게 어려워서 고민을 했는데 아예 제2외국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니까 오히려 감정이 실리게 되더라. 뒤로 가면서 오히려 편해졌던 지점들이 생겼다.”
-액션 장면도 많고 산에서 계속 뛰어다녔다. 거의 모든 장면이 야외 촬영이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게 너무 깨끗하고 맑은 공기와 쫙 펼쳐진 초록초록한 감성이 감정적으로 힘을 쓰는 신을 하고 나면 앉아서 기다릴 때 너무 힐링이 되는 거다. 도움 되는 게 더 컸다. 현장 다니고 이동하고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지점이니까. 나 혼자도 아니고 장비 들고 이동하고 하시는데 내가 힘들어하는 게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연이 주는 힘이 대단하구나 오랜만에 느꼈다. 보통은 세트 촬영 많이 하는데 오랜만에 긴 시간 자연 속에서 있는 게 되게 마음적으로 도움이 많이 됐다. 안정되는 느낌이 확실히 있었다. 자연이 주는 위대함이 화면에도 잘 담긴 것 같아서 좋았다.”
-엄마 역할도 처음이었다. 고민한 지점은 무엇인가.
“어머니상이 정해진 건 없잖나. 모두가 어머니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아진이라는 어머니는 내가 만들어 나가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모성애’라는 게 무엇일까 궁금했다. 아진을 보면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순간에 계속해서 해생이만을 바라보고 계속 나아가잖나. 그런 초인적인 힘이 어떻게 파생이 될까, 그게 모성애인데 그렇다면 모성애는 뭘까 생각하며 책도 찾아보고 정보도 뒤져보고 했다. 신기한 게 실제로 어머니가 됐을 때 호르몬이나 그런 체계가 바뀌는 지점이 있다고 하더라. 아버지도 그렇다더라. 그런 지점은 인식을 하거나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이뤄지는 부분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나아가는 지점들이 더 크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큐멘터리 같은 데 보면 동물들이 야생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이 있잖나. 어떤 상황에서 사람도 부모가 되면 그런 모습이 보여지는 부분이 있겠구나 그런 생각들이 좀 재밌었다.”
-딸 해생을 연기한 아역 배우 김민채와의 호흡은 어땠나. 너무 닮아서 놀랐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 같은데.
“일단 너무 귀엽다. 처음 만났을 때는 민채가 말이 없고 해서 낯가림이 있는 친구인가 싶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들, 음식이라든가 즐겨 보는 만화라든가 그런 걸 이야기하면서 친해지다 보니까 말을 잘하더라. 말이 없고 했던 게 긴장해서 그랬던 거라고 하더라. 준비해 온 연기를 해야 하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고 그래서 말이 없었던 거더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중요하겠구나 싶었다. 자연환경에서 촬영하다 보니까 쉴 때 민채와 도토리도 줍고 버섯도 관찰하고 그러면서 놀았다.
어린 친구다 보니까 사고가 말랑말랑하잖아. 모든 것들을 필터 없이 받아내잖나. 그런 것들에 있어서 컷 했을 때 민채가 민채로 돌아와서 장난을 칠 수 있게 도와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더 큰 도움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친해졌고 그 과정이 내게도 도움이 됐다. 내가 생각한 아진과 해생의 관계는 모든 걸 다 품어내는 자애로운 어머니라기보다 살짝은 아버지 같기도 하고 서툰 면이 있지만 ‘나는 우리 딸과 함께 나아갈 거야’라는 마음이 더 큰 어머니상이라고 생각해서 장난치고 그런 부분이 도움이 됐다.
나는 ‘마음이’가 첫 작품인데 그때가 민채 나이였다. 그래서 ‘내가 그걸 찍을 때 어땠지?’ 떠올리려고 노력했는데 생각이 안났다. 그런데 이미지적으로 남아 있는 장면들이 몇 개가 있었다. 그 기억의 조각 중 현장에서 나무에 열려있는 열매를 따서 엄마랑 씻어서 먹고 그랬던 기억이다. 정말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그게 남아 있다는 건 좋았다는 거잖나. 그런 부분들을 생각하면 도토리 줍고 그런 것들이 민채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상대 배우로서는 먼저 터치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고 연기적인 부분도 감독님이 원하는 게 있을테니까 내가 할 역할은 현장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재밌는 기억, 감정을 심어주고 싶었다.”
-스스로도 닮았다고 느꼈나.
“내가 봐도 닮은 것 같다.(웃음) 신기한 것은 촬영 들어가고 민채가 머리를 하고 분장하고 옷을 입어서 그런지 화면 속에서 더 닮아있는 느낌이 살아있는 것 같더라. 그래서 더 좋았다.”
-‘눈길’ ‘증인’ ‘아이’ 등과 이번 작품까지 필모그래피에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작품들이 꽤 많다. 선택 기준이 궁금한데.
“확고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닌데 배우라는 직업이 100%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제안을 준 것 중에 선택하게 되는 직업이잖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 마음이 가는 작품을 하다 보니까 그런 작품들이 중간중간 포진이 돼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 배우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을 연기하는 직업인 거잖나. 그런 걸 생각을 했을 때 장르적으로 재밌는 작품도 있겠지만 어느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지점에 있어서 ‘이 사람은 이런 환경에서 어떤 마음이 들까’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또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고 하다 보니까 그런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제안을 준 부분에 있어서도 내가 화려한 얼굴이 아니기도 하고 하다 보니까 작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다.”
-이번 작품으로 또 한 걸음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 배우로서 차근차근 걸어오고 있는데 20대 성인이 되고 나서 스스로 돌아보면 어떤지 궁금하다.
“20대 초반에 그 부담이 너무 컸다. 아역으로서의 이미지, 어릴 때부터 워낙 같이 성장해 온 이미지가 크다 보니까 대중 입장에서 간직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잖나. 그거에 대한 걸 계속 끌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즐거움을 드려야 하는 것과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에 더 도전하고 연기를 하고 싶은데 그 균형을 맞추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커서 그 시기에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나에게 그 시기마다 들어오는 작품들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100% 계획을 갖고 선택해서 커리어를 끌고 나가겠다고 하기에는 시나리오를 받아서 마음이 가면 하기도 하다 보니까 기준을 싹 바꿔서 ‘내가 이 역할을 해낼 자신이 있나? 할 수 있겠니 향기야?’ 그 질문만 보고 가고 있다. 그 질문엔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면서 다시 어렸을 때처럼 어느 정도의 자유도가 다시 생긴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어떤 캐릭터에 대한 틀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정확히 해내야지 하는 지점을 몇 년 동안 갖고 있었거든. 요즘에는 마음이 다시 괜찮아진 것 같아서 기대가 되고 스스로도 어떤 재밌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 하는 마음이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하려면.(웃음)”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주면 좋을까.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조화로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잘 느껴주고 화면적으로도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많이 담아내려고 모두가 열심히 노력했다. 최대치의 노력을 했다. 그걸 같이 느껴줬으면 좋겠다. 긴 흐름 속에서의 한 모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와서 그대로 영화를 느끼고 만약 4·3 사건에 대해 궁금해졌다면 검색 한 번 하게 된다면 감사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