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민법 제104조는 “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때에는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여, 한쪽이 지나치게 불리한 조건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상대방이 악용한 경우 그 법률행위 전체를 무효로 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단순히 형평에 어긋나는 계약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고, 당사자의 궁박 상태를 다른 쪽이 ‘악의적으로 이용했는지’와 ‘급부와 반대급부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있는지’를 두루 살펴봐야 한다.

법원은 사실관계를 면밀히 검토한 뒤, 서로의 사정이나 약정이 이 조항의 “현저히 공정을 잃은” 범주에 속하는지 여부를 판가름한다. 따라서 민법 제104조가 적용되면 그 행위 자체가 무효가 되어 애초에 체결된 계약으로부터 아무런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2024년 3월 12일 선고된 대법원 2023다301712 사건은, 이런 민법 제104조의 적용 가능성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예로 주목받는다.

문제의 발단은 주택을 임차한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다. 세입자는 보증금 2,000만원, 월세 60만원으로 주택을 임차해 살던 중, 집주인이 주택을 소외2 회사에 매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매수인 측은 계약서에 “임차인을 내보내지 못하면 매매 계약을 해제하고 위약금 6억8,400만원을 청구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거액의 위약금을 피해야 했으므로, 세입자를 조기 퇴거시키기 위한 방안을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집주인은 세입자와 협의해 임차권을 조기에 포기해 주는 대가로 2억2,500만원을 지급하기로 약정했다. 임대보증금 2,000만원과 이사비 명목의 500만원을 제외하면, 실제로 2억원가량을 더 주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그 2억원이 지급되지 않았다. 세입자는 이미 임차권을 포기하고 주택을 비워줬으니, 약속대로 2억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반면 집주인은 이 합의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세입자가 자신의 경제적 궁박을 악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노렸다”는 취지로 맞섰다.

집주인이 말한 ‘경제적 궁박’은 매매계약을 깨뜨릴 경우 부담해야 할 6억8,400만원의 위약금에서 비롯되는 절박함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이 ‘궁박’이 세입자 측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상황이 아니라, 집주인이 스스로 선택한 매매계약 조건에 의해 생긴 위험이라고 보았다. 원심 재판부는 집주인이 세입자의 조기 퇴거를 통해 얻는 이익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점, 즉 위약금을 면함으로써 막대한 손해를 피한 사실을 짚었다. 그러므로 임차권 포기에 따른 반대급부가 집주인 주장처럼 터무니없이 과하다거나, 세입자가 집주인의 궁박을 ‘악의적으로’ 악용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에서도 동일한 결론이 났다. 대법원은 약정이 성립된 배경을 종합해 볼 때, 집주인이 막다른 상황에 몰린 것은 본인이 매수인 측과 그러한 특약을 받아들인 결과이며, 세입자가 이를 과도하게 이용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민법 제104조가 적용되려면 당사자 사이에 급부와 반대급부의 균형이 현저하게 깨졌을 뿐 아니라, 상대방이 그 불리한 사정을 고의적으로 착취했음이 밝혀져야 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세입자가 요구한 금액은 집주인이 피할 수 있었던 위약금에 비하면 지나치게 과도하다고 볼 정도로 사회 상규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한 2억원은 여전히 유효한 채권이 되었고,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을 지지하며 집주인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판결은 법원에서 “궁박”을 이유로 불공정한 법률행위를 주장할 때, 해당 궁박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반대급부가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갖추고 있는지를 엄격히 살핀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집주인이 막대한 위약금을 떠안을 위기에 몰려 있었다 해도, 그것이 스스로 체결한 계약에서 비롯된 상황이라면 “상대방이 나의 궁박을 악용했다”고 주장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민법 제104조는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조항이 아니다. 당사자 사이에 다소 불균형한 거래가 이루어졌더라도, 법원은 실제로 그것이 상대방의 궁박·경솔·무경험을 틈타 악의적으로 맺어진 것인지, 아니면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조건인지부터 꼼꼼히 본다. 이 사건에서도 집주인은 궁박함을 호소했으나, 그 궁박 상태가 세입자가 만들어낸 결과로 볼 수 없고, 집주인이 매수인과 맺은 계약의 특약을 문제 삼아야 할 사정이라고 판단된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 판결은 금전적 어려움이나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고 해서 무조건 불공정한 법률행위로 인정받을 수 없음을 역설한다. 특히 부동산 거래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금액 규모가 큰 분야에서는, 한쪽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법원도 그것이 단지 “후회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무효를 선뜻 인정해주지 않는다. 결국 계약 체결 시점에서 충분한 검토와 신중함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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