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려원이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로 돌아왔다. / 바이포엠스튜디오
배우 정려원이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로 돌아왔다. / 바이포엠스튜디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정려원이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감독 고혜진)로 관객 앞에 섰다. 영화 ‘게이트’(2018)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그는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은 물론, 한층 섬세하고 깊어진 연기 내공을 보여주며 묵직한 존재감을 입증한다.

정려원이 열연한 ‘하얀 차를 탄 여자’는 피투성이 언니를 싣고 병원에 온 도경(정려원 분)이 경찰 현주(이정은 분)에게 혼란스러운 진술을 하면서 모두가 다르게 기억하는 범인과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는 서스펜스 스릴러다.

드라마 ‘검사내전’ ‘로스쿨’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 ‘마이 유스’ 등을 통해 섬세한 심리 묘사와 인물 중심의 연출을 보여준 고혜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지난달 29일 개봉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당초 단막극으로 기획, 제작됐으나 영화로 확장돼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얻었다. 제22회 샌디에고 국제 영화제에서 국제 영화상(BEST INTERNATIONAL FEATURE) 수상, 제66회 런던 영화제 스릴(Thrill) 부문 공식 초청에 이어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과 코리안 판타스틱 배우상 등 샌디에고, 런던 그리고 부천까지 3대 영화제에 초청되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정려원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했다. 극 중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진실을 찾는 작가 도경 역을 맡아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복잡한 내면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며 한층 깊어진 연기력을 보여줬다. 특히 각 인물의 시선에서 서로 다르게 비치는 도경의 모습을 다층적으로 풀어내며 영화가 지닌 미스터리한 정서를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정려원은 캐릭터 구축 과정부터 연기에 중점을 둔 부분 등 ‘하얀 차를 탄 여자’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진심으로 임한 작품”이라며 “그 과정 자체가 선물처럼 느껴졌다”면서 작품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2022년 촬영된 작품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본 소감과 개봉하게 된 소회도 궁금하다.

“런던과 샌디에고 영화제에 갔을 때는 1, 2부를 붙여놓은 버전을 봤고 개봉 버전은 재편집이 됐다. 스토리나 내용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얼굴로 치면 라인이 다듬어진 느낌이라 좋았다. 스토리가 너무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스피디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바뀐 버전이 더 새롭고 좋았다. 개봉까지 하게 돼서 정말 기쁘다. 계속 선물을 받는 느낌이다.” 

-해외 영화제 반응도 궁금한데.

“런던에서의 반응은 정말 놀라웠다. 스릴러의 본고장인데도 예상치 못하게 웃음이 터졌다. 영화 버전에서 몇 장면이 편집되긴 했지만 스릴러적 긴장을 풀어주는 유머가 조금 있었거든.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엄청 크게 웃더라. 리액션이 정말 좋았다. 샌디에고에서는 토요일 아침 상영이었는데도 객석이 꽉 찼다. 끝나고 나가려는데 어떤 분이 ‘너무 잘 봤다’며 껴안아 줬다. 한국 영화를 사랑한다고, 감동했다고 하더라. 고혜진 감독님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고 과정 자체가 아름다워서 그걸로도 좋았는데 오히려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강렬한 변신을 보여준 정려원. / 바이포엠스튜디오
강렬한 변신을 보여준 정려원. / 바이포엠스튜디오

-원래는 단막극으로 제작된 작품이었다고.

“추석 특집 단막극이었다. 겨울에 촬영을 했는데 편집본을 관계자들이 보고 영화로 만들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말에 힘입어 고혜진 감독님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두 편을 붙여 출품을 해본 거다. 마침 영화제 키워드가 ‘TV와 경계가 사라지는 영화’였는데 우리 작품과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신기했다.” 

-어떻게 캐릭터를 해석했나. 

“사람을 속이려던 건 아니다. ‘나 조현병 환자야’라고 말하는 게 내 방식이었다. 헷갈리는 진술을 하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는 그런 척을 해서 언니와 함께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는 정신이 말짱한 친구였다. 엄청나게 건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고 오랫동안 언니에게 강제적으로 약물을 투여받으며 억압당했던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최대한 정신을 붙들고 버텨온, 완전히 정상은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스라이팅을 오래 당한 사람들은 바로 반격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쌓아두다가도 막상 그 상황이 오면 몸이 먼저 굳고, 패닉에 빠진다. 도경은 작가기 때문에 상상력은 풍부했을 거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거야’라고 머릿속으로는 그려도, 언니가 나타나는 순간 사지가 굳고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다. 차에 시동을 걸고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그런 삶을 오랫동안 살아온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가 왔을 때 ‘이제 외부의 힘이 나를 구원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이 만든 판이 아닌 외부적 요인을 통해 겨우 풀려나는 감정을 담고 싶었다.”

-한 인물이었지만 상황마다 다른 결, 해석을 보여줘야 했다. 어떤 고민을 했나.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라고 생각했다. 한 배우가 연기하니까, 달라 보이는 캐릭터라도 결국 같은 사람처럼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다. 조현병 환자인 척하려기보단 ‘내가 조현병 환자라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상상을 많이 했다. 억지로 참고 표현하기보단 상상력에 맡겼다. 도경처럼 생각하다 보니 액션보다 말의 속도를 먼저 생각하게 됐고 대사도 리듬을 떠올리며 연기했다. 장면을 세 가지 버전을 찍은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피해자였던 사람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도 담겨있기 때문에 옹호하고 싶지도 않았고 피해자는 피해자인 채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 가해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지만 그래도 보통 선을 지키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각자의 구원과 용납이 있고. 영화에서 현주와 도경, 은서 세 인물이 본의 아니게 서로의 서사를 완성하는데 누구 하나가 절대 선이거나 악이 되면 안되겠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정려원이 캐릭터 구축 과정을 떠올렸다. / 바이포엠스튜디오
정려원이 캐릭터 구축 과정을 떠올렸다. / 바이포엠스튜디오

-어떤 결말을 마주하고 지은 도경의 표정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연기했는지.

“악인과 선인의 경계를 딱 잘라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바로 ‘됐다’라고 반응하면 너무 계산된 악인이 될 것 같았다. 확신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며 다가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기뻐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감정, 오랫동안 억눌린 마음이 서서히 풀리는 로딩의 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장면은 다른 신들보다 길게 찍었다. 해방의 순간이지만, 온전히 계획된 결과가 아니라 꿈에 그리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느끼는 낯선 자유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고혜진 감독의 강점을 더 이야기해 준다면. 

“마음밭이 정말 깨끗하다. 웬만한 건 다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편견이 없고 꼬이지 않았다. 그릇이 투명해서 상대가 보면 있는 그대로 담기는 느낌이 있다. 본인의 손으로 일부러 꺾거나 뒤집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그림을 그릴지 명확하고 필요한 색을 고를 때 신중하다. ‘일단 해보고 고치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방향이 뚜렷한 사람이다.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느꼈다. 추운 날인데도 굳이 직접 와서 그 친구만 들을 수 있게 디렉션을 주고 주변 사람들은 왜 그런 연기를 했는지 모르게 배려한다. 그래서 주눅 들지도 않고 기분 나쁘지도 않다. 그런 걸 보고 ‘어린 친구지만 감독 자질이 있다’고 느꼈다. 사람을 정말 존중하는 사람이다.”

-외적인 모습은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나. 

“가장 반가웠던 건 메이크업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분장은 있었지만 화장을 덜어내도 된다는 해방감이 있었다. 머리는 컬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손질하지 않은 내 머리다. 원래 부스스한 머리다. 감금된 사람의 억눌린 느낌을 표현하고자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 갔다. 산발한 머리에 손이나 옷, 생활감 있는 디테일을 더했다. 오랜 시간 난방도 없는 집에서 겨울을 나는 사람이라면 어떤 옷을 입을까, 여러 옷을 겹쳐입지 않을까 하며 룩을 완성했다.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아 현장에서는 오히려 편했다.”

정려원이 작품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 바이포엠스튜디오
정려원이 작품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 바이포엠스튜디오

-이정은과의 호흡은 어땠나. 

“이정은 선배는 정말 타고난 배우다. 말 한마디 없이 눈빛이나 표정만으로도 상대를 멈칫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냥 이렇게 보고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눈물이 그렁하거나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분위기를 확 바꾼다. ‘저걸 어떻게 하지?’ 싶을 정도로 놀라울 때가 많았다. 전반적으로 말투나 리액션이 느린 편인데 연기할 때는 전환 속도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다. 그건 타고난 감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옆에서 그 기운을 많이 받았다.”

-이 작품으로 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실 고혜진 감독을 도와주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그게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 촬영하면서 처음으로 욕심이 없었다. 그냥 최선을 다하고 오자는 마음뿐이었다. 14회차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럼 하고 싶은 거 다 하자’고 했다. 그래서 끝나고 나서도 미련이 전혀 남지 않았다.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고 헤어질 때의 개운함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다 했다는 마음이었는데 영화제에 가고 배우상까지 받아서 정말 보너스 같았다. ‘이게 뭐지?’ 싶을 정도였다. 감독님도 관객상을 받으셨다. 마음을 비우면 이런 일이 생기나 싶을 만큼 신기한 일의 연속이었다. 부천영화제에 온 관계자분이 ‘이 영화를 런던 영화제에서 상영해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게 실제로 성사됐다. 그래서 다른 영화제에도 출품을 했고 샌디에고에서 연락이 왔다. 고혜진 감독이 영어 자막부터 인터뷰까지 혼자 다 준비했다. 통역 없이 진행하는 걸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준비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스스로 만족도도 있을 것 같은데.

“연기가 하면 할수록 어렵지만 동시에 자신감이 생긴다. 연기는 평생 숙제 같다. 예전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왜 그랬을까’ 싶은 순간이 많았다.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좋은 사람’의 기준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자기 자신에게 진솔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 사람이 단단해지는 것 같다. 예전엔 감독이 알아주길 바라기만 했는데 이제는 내가 느끼는 걸 스스로 말할 수 있다. 그걸 배우고 나니 연기가 훨씬 편해졌다. 나이 들며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이번 작품도 원래 잘 우는 편이라 크게 어렵지 않았다. 큰 숙제처럼 느껴지기보다 자연스럽게 풀렸던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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