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여정, 적은 임금, 혹한, 몇 달간 완전한 어둠, 끊임없는 위험, 무사 귀환 불확실,
성공 시 명예와 영광."
- 어니스트 섀클턴 벌링턴(‘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 공고, 1914년 3월) -
시사위크=박설민·김두완 기자 ‘허락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우리는 ‘남극(Antarctica)’을 이렇게 묘사하곤 한다. 실제로 남극은 지구 끝단 ‘극지(極地)’에서도 가장 춥고 혹독한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곳이다. 아문센, 스콧, 섀클턴 등 내로라하는 과학자들과 탐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남극으로 향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 들어 남극이 가진 고립과 위험성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남극에서의 모험은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한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도 이 가슴 떨리는 열정을 따라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약 한 달간 ‘세상의 끝’을 찾았다. 가벼운 농담에서 시작된 28일간의 취재 여정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 꿈처럼 던진 ‘남극행’, 현실이 되다
“농담이어도 좋다. 무엇이든 던져라.”
편집국장과 회의를 할 때마다 늘 듣던 말이다. 우리의 남극 취재도 그 농담 같은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남극 이야기를 처음 꺼낸 건 2023년 11월. 내년도 기획취재 아이템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기후변화를 독자들에게 더 생생히 보여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툭 던졌다.
“남극을 가보면 어떨까요?”
순간 편집국장도 팀장도 눈빛이 반짝했다. 그러나 그 기류는 곧 식었다. 남극은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프로젝트’였다. 비용은 막대하고, 인력은 빠듯하며, 성과도 장담할 수 없었다. 팀장은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라며 조심스럽게 어깨를 다독였고, 회의실에는 더 이상 남극의 ‘남’자도 꺼낼 수 없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남극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다큐멘터리에서 본 고요한 풍경 때문인지, 기자로서의 특종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누구도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본능 같은 도전심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 남극을 취재하고 싶다는 열망만은 선명했다.
기후위기 취재를 준비할수록 그 열망은 더 깊어졌다. 책상 위 데이터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현장의 온도’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빙붕 붕괴 속도, 펭귄의 이동 패턴 변화, 해양생태계의 흔들림을 읽어낼 때마다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을 남극에서 직접 보면 어떤 광경일까?’
그렇게 시간이 흐른 12월 연말 기획회의. 편집국장이 불쑥 말했다.
“남극 기획은 왜 안 가져왔어?”
그 말에 순간 몸이 굳었다. 농담처럼 흘렸던 남극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누구보다 현실적인 대표마저 “힘들어도 한번 해보라”고 응원을 건넸다. 츤데레 같은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의 여정은 농담처럼 시작해 현실의 한 걸음이 됐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으로 향하는 우리의 남극행은 그렇게 열렸다.
◇ 결정된 남극행, 쏟아지는 서류들
남극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후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리가 방문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는 ‘남극세종과학기지’로 확정됐다. 세종기지는 지난 1986년 한국이 남극조약에 가입한 이후, 남극 연구를 위해 1988년 2월 건설된 기지다. 서남극 킹조지섬 바톤반도에 위치하며 매년 18명의 월동연구대가 파견된다. 이곳에서는 △대기과학 △생물학 △지질학 등 다양한 연구가 이뤄진다. 특히 극지 기후변화 연구에 있어 세종기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접근성·연구분야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한 결과, 세종기지는 남극 취재에 있어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나 관건은 ‘극지연구소(KOPRI)’의 허가를 받을 수 있느냐였다. 매년 100여명의 하계대 과학자들이 남극의 ‘여름’에 해당하는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세종기지를 방문한다. 때문에 극지연구소에서는 기지 운영 자원, 식자재, 상주공간 등을 고려해 하계대 기지 방문팀을 선발한다. 이를 감안해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은 팀장과 나, 2명의 기자로 최소화했다.
남극이라는 특수한 장소에 가기 위해 처리해야 할 서류도 산더미였다. ‘극지과학기지 방문신청서’부터 ‘남극 하계 현장 활동계획서’ 등 10개가 넘는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그중 ‘남극활동 허가신청서’는 ‘남극특별보호구역(ASPA) No. 171 나레브스키 포인트’, 일명 ‘펭귄마을’을 방문하기 위해 반드시 준비해야 할 서류였다. 취재목적과 체류 기간, 체류시 주의해야 할 사항 등을 꼼꼼히 체크해 서류를 작성했다.
◇ 조마조마한 ‘서류 제출’… 인원·취재 기간 감축의 걱정
극지연구소에 서류를 제출하고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기다리는 동안 가장 걱정된 것은 ‘인원수 조정’ 문제였다. 실제로 기다리는 기간 환경부에서 ‘남극활동 허가 협의 검토의견(세종 1차)’ 서류를 전달받았다. 이 서류에는 시사위크 취재팀보다 한 달 앞선 11월 남극을 방문하는 모 방송국에 인원수 조정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류에서는 “남극특별보호구역의 방문 등 본 활동으로 인한 환경적 영향의 발생 우려가 있으며 연구 목적이 아닌 예능방송에 해당하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한 것”이라며 “국제적으로 남극의 고유한 환경과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과학연구 목적에 한해 남극활동을 허용하고 있어 28명의 인원은 과다하므로 최소한으로 인원 감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즉, 과학자가 아닌 시사위크 취재팀도 인원 감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환경부는 “특정기간에 중첩해 다수의 인원이 기지를 이용, 오수 등 폐기물의 발생과 처리에 따른 환경부하와 기지요원의 안전문제가 우려된다”고 검토의견을 밝혔다. 연구 인원이 아닌 취재 목적으로 방문하는 입장에선 자칫 민폐가 될까 걱정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극지연구소와 환경부의 검토를 기다렸다. 그리고 10월, 극지연구소 측에서 연락이 왔다. 당초 취재가 가능했던 기간은 과학자들의 입·출남극 시기에 동행 할 수 있는 12월 3일부터 1월 8일까지였다. 하지만 몇몇 과학자분들의 입남극 기간이 조정되면서 시사위크 취재진도 12월 15일부터 입남극이 가능하도록 변경됐다. 처음 예상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25일의 취재 기간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최근 언론사에서 이렇게 장기간 남극에 체류한 적은 없었기에 기대감도 커졌다.
극지연구소와 환경부, 외교부의 서류가 통과된 후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극지안전훈련’뿐이었다. 극지연구소에서는 매년 세종기지와 장보고기지, 북극다산과학기지, 쇄빙선 아라온호에 파견되는 연구 인원들을 대상으로 안전훈련을 진행한다. 이제 이 훈련만 마치면 사실상 ‘남극행’이 확정된다고 볼 수 있었다.
2024년 11월 13일, 남극특별취재팀 멤버인 팀장과 함께 부산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용당캠퍼스에 도착했다. 이틀간 안전 훈련이 진행될 곳이었다. 극지 파견 연구원들뿐만 아니라 선박 승무원, 해상안전요원들도 훈련을 받는 교육시설로, 구명보트부터 소방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갖춰져 있다.
훈련은 △해양안전 △소방안전 △기초안전훈련 등 총 3가지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가장 먼저 실시한 기초안전훈련은 이론 교육으로 진행됐다. 저체온증 대처 방안, 선박 사고 시 탈출 방법, 구명조끼 착용법, 구명보트 사용법 등의 교육이 진행됐다. 교육과정에서 강사님은 우리에게 “이제 극지인들은 남극과 북극을 대표하는 ‘국가대표’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재미로만 느껴졌던 남극행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도전인지 무겁게 와닿았다.
기초안전훈련이 끝난 후, 대망의 ‘해양안전’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선박 침몰 시 탈출 입수, 구명보트 탑승, 생존 수영 교육을 받아야 했다. 약 10m 정도로 보이는 깊은 수영장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수영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기자 입장에선 ‘심해’처럼 깊게 느껴졌다. 반면 해군 출신인 팀장은 수영에 아주 능숙해 평온한 표정이었다.
생존 수영의 경우 몸이 제대로 가눠지지 않았다. 그래도 구명조끼 덕분에 물에 뜰 수 있어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구명보트 탑승’ 훈련이었다. 물을 먹은 구명복에 몸이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물속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온몸의 근육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간신히 팀장과 다른 팀원들의 도움을 받아 보트 위로 올라왔을 땐 그 어떤 운동을 했을 때보다 몸이 지쳐 있었다. 그래도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발급된 ‘해상생존 교육수료증서’를 받자 뿌듯했다. 마치 남극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안전교육을 마치고 극지연구소 측에 모든 서류 제출을 완료했다. 이제 2024년 12월 15일, 남극세종과학기지를 향해 출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기분이었다. 물론 이것은 ‘착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