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hero)를 다룬 이야기는 흥행불패다. 악당과 대적하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정의를 쫓아가는 과정 속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여기엔 세상을 향한 일침이 있고, 잠들어있던 인류애를 깨운다. 어쩌면 우린 각박한 현실에서 나를 도와줄 히어로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멀리 있지 않다. 당장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따뜻한 뉴스로 종종 찾아온다. 목숨을 걸고 이웃을 구한 시민 영웅들이다.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 당신도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다. | 편집자주

경비원 인원 감축안을 부결시킨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호수마을 4단지는 입주민들과 경비원들 간 ‘상생’의 방법을 찾아가는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 소미연 기자
경비원 인원 감축안을 부결시킨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호수마을 4단지는 입주민들과 경비원들 간 ‘상생’의 방법을 찾아가는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단초를 제공한 것은 한 초등학생의 소자보(사진 속)였다. / 소미연 기자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아파트 경비원 인원 감축 문제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무인경비시스템 도입 확대로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지 오래고, 최저임금 상승 추세는 입주민들의 인건비 부담으로 다가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처우개선을 말하기도 쉽지 않다. 2014년 10월, 입주민의 언어폭력에 시달린 50대 경비원 이만수 씨가 분신자살을 시도해 숨진 사건 이후에도 경비원들의 근로환경은 열악했고, 더 위험해졌다. 고용 불안도 모자라 안전 사각지대까지 내몰린 셈이다. 대책이 필요하다.

◇ ‘인력 감축안’ 입주민 반대 70% 이상, 비결은?

<시사위크>가 찾은 곳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호수마을 4단지다. 입주민들이 기존 20명의 경비원들을 10명으로 감축하는 안건에 대해 찬반 투표를 진행하고, 그 결과 경비원 모두를 지켜내 화제가 됐던 곳이다. 벌써 3년 전 겨울이다. 당시 “돈이 부족하면 입주민들이 좀 더 내면 되지 않겠느냐”며 아파트 내 소자보를 붙였던 6학년 여학생은 이제 교복을 입고 중학교를 다닌다. 학생이 살고 있는 동 앞 초소에서 만난 경비원 정모 씨는 “입주민들은 잊었을지 모르나, 우리들은 잊을 수가 없다”며 여전히 고마운 마음을 간직했다.

현재 4단지는 16명의 경비원들이 관리하고 있다. 올 6월 용역업체가 교체되면서 4명이 자발적으로 퇴직한 상태다. 이후 나머지 16명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손놀림이 바빠졌다. 입주민들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존 20명의 인원을 유지하기로 한 만큼 부족한 인원을 고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연말께 의견 수렴 과정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다른 아파트들과 달리 이곳은 단지 내 입주민들의 전체 투표로 안건을 결의한다. 경비원 인력 감축안이 여러 차례 안건으로 올랐으나, 그때마다 부결됐다.

경비반장을 맡고 있는 서모(67) 씨는 “좋은 분들이 참 많다. 고마운 마음을 표시할 길은 우리가 더 잘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일과 3일 <시사위크>가 찾아갔을 때도 단지 내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 단지 주변엔 쓰레기 하나 없었다. 평소에도 입주민들에게 ‘더’ 친절한 모습으로, ‘더’ 깨끗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다른 경비원들도 같은 생각이다. 서씨의 주도 하에 곡괭이로 땅을 파고 보도블록을 깔았다. 몇 달이 걸렸다. 단지 사이사이를 에워 산책로를 조성했다.

경비원들은 솔선수범했다. 묵묵히 일했고, 무엇보다 입주민들을 위한 일을 찾아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렇게 만든 것이 산책로다. 입주민들은 경비원들의 노력을 인정했다. / 소미연 기자
경비원들은 솔선수범했다. 묵묵히 일했고, 무엇보다 입주민들을 위한 일을 찾아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렇게 만든 것이 산책로다. 입주민들은 경비원들의 노력을 인정했다. / 소미연 기자

서씨는 경비원들이 직접 만든 산책로를 보여주며 “입주민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누가 보든 안보든 정해진 근무시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입주민들에게 인정받으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에서 뿌듯하다”고 설명했다.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 경비원 인력 감축안에 반대하는 입주민의 비율이 매번 70% 이상 나왔다. 경비원들에겐 자부심이다. 서씨는 입주민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게 된 비결로 두 가지를 꼽았다. “묵묵히 일해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다.

◇ 입주민들에게 고마우니 ‘내가 더 잘하자’ 

사실 4단지에 처음부터 꽃이 피었던 게 아니다. 8년 전부터 경비원들이 꽃을 심고 가꿔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입주민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계속 보기 위해서다. 입주민들도 경비원들의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입주민은 “우리 단지가 넓고 나무가 많아서 관리인들이 일을 많이 한다. 함께 지낸 시간도 길다. 무작정 사람을 내보내는 것보다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옳다”고 말했다. 서씨는 이곳 아파트에서만 11년 넘게 근무했다. 얼마 전 퇴사한 경비원 중에는 20년 가까이 근무한 사람도 있었다.

며칠 전이다. 서씨는 한 초등생한테 “고맙습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잡수세요”라고 메모가 붙은 거봉을 받은 사실도 자랑처럼 늘어놨다. 그는 “다른 아파트에 비해 장기 근무자가 많은 것도 경비원과 입주민간 신뢰가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면서 “나이 환갑을 넘긴 경비원이 태반이다. 우리가 오래 일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더 잘하자’는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서씨를 비롯해 경비원들은 가을맞이에 들어갔다. 곧 국화꽃이 화단을 덮게 된다. 잡초도 뽑고 낙엽도 쓸어야 한다. 볕이 따가워도 웃음이 절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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