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연미선·권정두·김두완 기자 지난 5월 7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위치한 고분다리어린이공원.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였지만 놀이터를 찾은 아이들의 표정엔 생기가 넘쳤다. 그네와 미끄럼틀 등의 놀이기구로 뛰어들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평소 너무나 익숙했던 이곳의 공간과 시설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자신들의 놀이공간을 직접 변신시키기 위해서다.
◇ 민관이 뭉친 놀이환경개선사업, 그 중심에 선 아이들
서울시와 강동구, ㈜코오롱, 세이브더칠드런은 지난 3월 업무협약을 맺고 도시놀이터 개선사업에 착수했다. 서울시와 강동구가 부지제공과 행정 및 지역 어린이·주민 참여 지원 속에 ㈜코오롱이 사업비를 후원하고, 세이브더칠드런은 ‘놀이터를 지켜라’ 캠페인 일환으로 사업 전반을 실행하며 아동 놀 권리 인식개선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번 사업에 참여한 ㈜코오롱은 2016년부터 8년째 민관협력 어린이놀이터 재정비를 후원해오고 있다. 또한 세이브더칠드런은 2014년 ‘놀이터를 지켜라’ 캠페인을 시작해 10여년간 110곳의 놀이환경개선사업을 수행해왔다.
고분다리어린이공원 놀이환경개선사업 디자인 워크숍은 바로 인근에 위치한 교회에서 진행됐다. 첫날인 5월 7일엔 우선 코오롱그룹에서 운영 중인 신재생에너지 교육프로그램 ‘찾아가는 에너지학교 에코롱롱’이 아이들을 위해 마련됐다. 아이들은 특수 개조된 트럭에서 각종 친환경 에너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큰 흥미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다소 서먹했던 분위기도 한결 풀리는 모습이었다.
이어 놀이환경개선사업 디자인 워크숍이 본격 시작됐다. 먼저, 기존의 놀이시설을 평가하고, 어떤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을지 구상하기 위한 기초 작업들이 진행됐다. 아이들은 고분다리어린이공원으로 나가 놀이를 하며 기존의 시설들을 꼼꼼히 살폈다. 이어 놀이터 지도에 ‘재미있는 공간’과 ‘재미없는 공간’, ‘위험한 공간’ 등으로 구분해 스티커를 붙여보기도 하고, 실내로 이동해 조별로 의견을 공유한 뒤 이를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 과정에서 특히 미끄럼틀에 대해 아쉽다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미끄럼틀이 너무 짧고 평범해서 재미가 없다는 평가였다. 어른들의 시선에선 나오기 힘든, 놀이터에서 직접 노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지적이었다.
이후 5월 14일과 21일에 마련된 2차, 3차 디자인 워크숍에서는 아이들이 직접 자신들이 원하는 놀이공간을 그림과 모형으로 만들어보고 발표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른들의 시선에선 다소 엉뚱하거나 현실적으로 구현이 어려워 보이고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졌지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와 의미를 들어보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렇게 새로운 놀이공간을 상상하며 꾸며보는 시간이 마무리되고 발표가 이어졌다. 가족이 함께 탈 수 있는 미끄럼틀, 공연 놀이를 할 수 있는 무대, SNS용 콘텐츠를 촬영할 수 있는 포토존, 10개 이상의 숨을 공간이 있는 터널, 그리고 친구들과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점 등의 아이디어가 특히 이목을 끌었다.
아이들의 워크숍 활동이 끝나면 부모 및 주민들이 참여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아이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이를 구현시킬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가 하면, 아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놀이터의 입지적·공간적 특성 등 여러 고려사항과 그에 따른 개선 필요성이 다뤄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 못지않게 적극적인 어른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디자인 워크숍을 통해 아이들과 부모 및 주민들이 내놓은 여러 아이디어들은 전문 설계 업체에 의해 최종 디자인 안으로 확정돼 지난 6월 발표회를 통해 공개됐다. 현재는 공사가 한창이며, 새롭게 탄생할 고분다리어린이공원은 오는 9월 다시 개장할 예정이다.
◇ 놀이공간의 주인은 아이들… 공간부터 함께 만든다
고분다리어린이공원 놀이환경개선사업을 주도한 국제아동권리 NGO 세이브더칠드런은 2014년부터 놀 권리 회복 프로젝트인 ‘놀이터를 지켜라’ 캠페인을 이어오고 있다. 민관과 연계해 농어촌·지역아동센터·도시·학교 등의 놀이환경을 개선하는 아동 놀 권리 보장 활동이다. 지난해까지 109곳의 놀이환경을 개선했고, 현재도 활발하게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의 놀이환경개선사업에서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바로 ‘아이들의 참여’다. 과거 우리나라는 놀이터 등 아이들의 놀이환경이 어딜 가나 천편일률적인 풍경이었다. 세이브더칠드런 경인지역본부 인천아동권리센터 조규민 센터장은 “이전엔 놀이터의 주인은 아이들이라고 말만 할 뿐 정작 그 놀이터를 만드는 건 다 어른들이었다”며 “아이들에게 의견을 묻지도 않았고, 그네와 시소 등이 구색 맞추기 식으로 배치돼 획일적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보니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을 아이들이 외면하고 찾지 않아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달리 세이브더칠드런의 놀이환경개선사업은 철저하게 아이들로부터 출발한다. 놀이터의 주인공인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 목소리를 기반으로 놀이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더 번거롭고 여러 어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낸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경우와 안전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다. 이때 세이브더칠드런은 아이들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원만하게 완성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한다.
조규민 센터장은 “주어진 공간 대비 너무 많은 놀이시설을 원한다거나 건물 5층 높이에서 내려오는 미끄럼틀, 30명이 같이 탈 수 있는 트램펄린 같은 구현이 어렵거나 안전상의 기준에 충족하기 힘든 아이디어들이 나오기도 한다. 또한 독립된 공간을 요구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안전상의 문제와 부딪힌다”며 “그럴 땐 적절한 제안이나 설명 등을 통해 가능한 방향으로 논의가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동안 여러 사업을 진행하며 디자인 워크숍에서 아이들의 의견을 접해온 바로는 다소 미숙할거라는 어른들의 선입견과 달리 오히려 아이들 스스로도 안전에 대해 굉장히 많이 고민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일련의 진행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 문제가 해소되기도 한다. 놀이환경개선사업 디자인 워크숍에 참여한 아이들은 보통 우선 평면적인 그림으로 놀이공간을 구상한 뒤 이를 입체적으로 구조화시킨 모형을 제작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 처음엔 창의적인, 다르게 말해 현실적으로 구현이 어려운 아이디어가 두드러지지만 모형을 제작하는 과정에 이르면 위험성이나 구현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아이들이 놀이환경개선사업에 참여하면서 단순히 의견만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경험도 얻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놀이공간들은 제각기 특성이 뚜렷하다. 특히 어른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는 사례가 많다.
2021년 충남 공주중동초등학교에 마련된 ‘동그랑땡 놀이터’는 ‘교실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바깥으로 내려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동화 같은 아이디어를 반영해 복도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그물 놀이기구 및 미끄럼틀로 바로 연결돼 1층까지 내려올 수 있는 시설이 설치됐다. 2022년 진행된 광주 금호초등학교 ‘우당탕탕 놀이터’도 운동장과 학교 건물 사이에 있는 계단식 스탠드 공간 일부에 암벽등반과 미끄럼틀 등을 설치해 놀이공간으로 변신시켰다.
꼭 화려하거나 강한 모험심을 자극하는 놀이시설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이 사업의 주 대상인 초등학생들은 놀이기구 뿐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려 다양한 놀이를 하며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미끄럼틀이나 그네, 시소 등의 놀이기구는 놀 수 있는 방법이 한정적이지만 친구들과의 놀이는 그때그때 다르고 새롭기 때문이다. 실제 이번 고분다리어린이공원 디자인 워크숍에서도 아이들이 가장 즐겨하는 놀이로 숨바꼭질이 꼽혔고, 숨바꼭질을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제시되기도 했다.
2021년 꾸며진 부산 월평초등학교 ‘벚꽃놀이터’ 역시 모험적인 놀이시설이 아니라 학교를 상징하는 오래된 벚꽃나무 아래에서 쉬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전망대, 의자, 데크 등 나무로 된 시설들이 마련된 바 있다.
조규민 센터장은 “어떤 놀이공간이 좋은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또 주도적으로 놀 수 있는 공간이 가장 좋다는 게 아동학자들의 주된 이야기”라며 “그네면 그네 미끄럼틀이면 미끄럼틀 하나의 요소만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놀이기구나 형태보단 아이들이 그 공간을 창의적으로 이용하면서 주도적으로 놀 수 있는 놀이공간이 좋은 놀이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유휴·여유 공간, 즉 공터에 대한 부분들도 굉장히 강조된다”고 말했다.
고무적인 점은 세이브더칠드런의 ‘놀이터를 지켜라’ 캠페인 외에도 최근 놀이환경을 새로 조성하거나 개선할 때 아이들을 참여시키는 사례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아이누리놀이터 조성사업을 통해 관내 놀이공간 개선을 이어오고 있는 동두천시는 그때마다 어린이참여단을 구성해 참여시키고 있다. 현재 햇님어린이공원에서 내년 7월 완료를 목표로 진행 중인 사업 역시 올해 초 25명으로 이뤄진 어린이참여단을 발족시켰다. 또한 올해 하반기 준공을 목표로 1만9,000㎡ 규모의 ‘기적의 놀이터’를 건설 중인 전북 정읍시도 설계 과정에서 아동 관련 전문가와 놀이터 전문가는 물론, 아이들도 참여하도록 했다. 전남 강진군은 지난 1월 아이들로 구성된 아동참여위원회와 함께 ‘강진군 어린이 놀이시설’을 주제로 자유롭게 의견을 공유하는 토론회를 진행했으며, 이를 향후 정책 추진에 적극 반영할 방침이다.
조규민 센터장은 “놀이환경을 만드는 과정에 아이들이 참여하는 건 아이들에게 ‘내가 주인이다’라는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아동 참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놀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로 꼽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자기주도성’이다. 놀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 아이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그 출발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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