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사법개혁의 파고가 거세다. 정치권은 내란재판의 공정성을 명분 삼아 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사법부는 독립을 내세우며 맞서고 있다. 국민 여론은 이미 사법 불신으로 골이 깊어진 상황이지만, 입법권력과 사법권력 간 힘겨루기가 격화하면서 사법개혁의 본질은 사라지고 쟁점만 남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 ‘신중·숙의·공론화’… 반대와 동의 사이
지난 12일 열린 전국법원장 임시회의에서 사법개혁을 둘러싼 법원장들의 발언이 공개됐다. 회의에 모인 각급 법원장들은 ‘사법부 독립’의 가치를 앞세우며 ‘신중한 검토’와 ‘충분한 공론화’를 반복했다. 정치권이 사법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며, 조희대 대법원장을 향한 사퇴 요구까지 불거진 가운데, 사법부는 ‘신중과 숙의 및 공론화’란 모호한 표현 뒤에 발톱을 감춘 모양새다.
이날(12일) 회의에서 법원장들이 가장 자주 사용한 표현은 ‘신중’과 ‘공론화’였다. 대법관 증원 문제에 대해서는 “재판 지연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면서도 “사법제도의 근간을 건드리는 만큼 충분한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실상 속도 조절을 강조한 셈이다.
하지만 일부 법관들이 “4명 정도의 소규모 증원이 적정하다면, 사실심에 대한 인적·물적 지원의 선행돼야”란 의견을 제시한 것은 역설적으로 법관들도 대법관 증원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법관평가제에 대해서도 위헌 소지를 언급하며 부정적 기류를 내비쳤다. 다만 전면 반대 대신 “사법부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의 검토”라는 표현으로 돌려 말했다.
판결문 공개 확대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찬성했으나 “개인정보 보호와 수사 기밀 보장 대책이 필요하다”는 조건을 달았다.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논의 역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겉으로는 균형 잡힌 태도로 보이지만 결국은 반대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못한 채 신중론 뒤에 숨은 모습이라는 지적이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됐다.
눈에 띄는 부분은 법원장들이 단순히 반대의 의사를 표하지 않고 조건부 동의의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대법관 증원은 사실심 강화가 전제돼야 한다” “판결문 공개는 개인정보 보호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식이다. 이 같은 단서들은 개혁 자체를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사법개혁 논의의 배경은 국민의 ‘사법 불신’에 있다. 내란 사건 재판을 통해 국민들은 내란 우두머리가 구속이 취소되는 상황을 지켜봤고, 오늘까지(15일) 피의자 윤석열이 9회 연속 내란재판에 불출석하는 것을 목격했다. 국민들에게 사법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법원장들이 개혁 자체를 거부할 경우 여론의 역풍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과 삼권분립의 균형을 내세우며, ‘신중검토’란 화법으로 성난 국민 여론을 일단 잠재우는 전략으로 보인다. 이번 법원장 임시회의에서 보여준 태도를 두고 ‘언어의 정치학’이란 평가가 중론을 이루는 이유다.
한 법학자는 “사법개혁의 본질은 국민 신뢰 회복인데, 이번 회의는 이를 위한 구체적 대안을 내놓기보다 애매한 표현으로 시간을 벌려는 모양새였다”며 “결국 국민은 결과로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부가 던진 언어는 방어막일 수도, 개혁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모호한 언어가 아니라, 신뢰 회복을 위한 실질적 개혁이다. 법원이 스스로 신뢰를 증명할 때, 사법개혁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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