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세종과학기지 안진현 제38차 월동연구대 전기설비대원 인터뷰
월동대 시설유지반, 전기설비·소방시설 등 운영 및 정비 업무 담당
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전기’가 없는 일상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전제품부터 난방, 통신,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전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극’과 같은 극한 환경에서 원활한 전기의 공급은 생명과 직결된다.
매년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와 장보고과학기지에 ‘전기설비’를 담당하는 월동연구대원’이 필수로 포함돼있다. 기지 내 전기시설부터 소방설비까지 전기 및 안전과 관련된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세종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에선 안진현 전기설비 대원이 이 임무를 맡았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은 한국에선 느낄 수 없는 ‘짜릿한 추위’를 찾아 남극에 온 안진현 대원에게 전기설비대원의 일상 이야기를 들어봤다.
◇ 1분 1초, 쉴 틈이 없는 전기대원의 하루
세종기지에 체류하던 지난해 12월 오전, 고요한 남극의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화재 알람 소리가 울렸다. 예고 없이 울린 알람에 기지 내 월동대원들과 하계대 연구원들 모두 밖으로 비상대피했다. 혹여나 세종기지 시설에 화재라도 발생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잠시 후, 김원준 월동대장은 이 알람이 전기 누선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도감이 들었다. 고립된 세종기지에서 발생한 화재는 매우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불이 났을 때 신고할 수 있는 소방서도, 부상 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병원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기지 내 체류 인원 모두가 안도한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안진현 대원의 업무는 지금부터였다. 화재 알람 오작동이 일어난 전선의 누선 부위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단순 해프닝이었지만 실제 화재가 발생했을 시 제대로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면 큰일이었다. 때문에 수십개가 넘는 전선을 하나씩 점검한 후, 정확한 원인을 파악해 수리를 해야 했다.
이처럼 전기설비대원은 기지 내 모든 전기 관련 시설과 설비를 관리·유지·보수하는 임무를 수행 한다. 스위치‧콘센트‧전등 등의 간단한 전기 설비부터 △신규 장비의 전원 설치 △UPS(무정전 전원 장치 / 전원공급장치 일종) △태양광 등의 전기부설설비와 전기 안전을 담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화재 알람처럼 기지 내 설치된 여러 소방 설비 등도 전기설비대원이 관리한다.
매우 중요한 임무이기에 단순히 ‘하고싶다’해서 전기설비 업무에 지원할 수 없다. 월동대 파견을 담당하는 ‘극지연구소(KOPRI)’에서는 엄격한 기준으로 남극기지 전기설비대원을 선발한다. 실제로 극지연구소의 ‘남극과학기지 월동대원 직무기술서’에 따르면 전기설비대원에 지원하기 위해선 △해당 분야 5년 이상 경력자 △전기기능사 등 관련 자격증 소지자가 필수조건이다.
안진현 대원은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전기설비대원으로서 모든 전기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크다”면서도 “하지만 모두의 안전이 걸린 임무인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안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생활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화재 알람 오류 역시 전선의 상처로 인해 발생한 듯 하지만 아직 정확히 알 수가 없다”며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다른 전문가분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저 스스로 해결해야 해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 넘치는 모험심, 전 세계를 항해해 본 청년
전기설비대원은 세종기지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안진현 대원이 남극에 오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의 남극 연구 발전을 위해서’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시원한 곳을 찾아서’였다. 다소 황당한 이유처럼 들렸지만 안진현 대원은 진지했다.
안진현 대원은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인생 목표 중 하나가 1년 내내 추운 곳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며 “허황된 꿈이라 생각했는데 출근 지하철에서 극지연구소 세종기지 채용공고를 보게 됐고 이를 목표로 준비해 제38차 월동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단순한 지원 이유와 달리 안진현 대원은 전기에 있어서 만큼은 ‘베테랑’이다. 세종기지에 오기 전 코엑스 전기실에서 약 5년간 근무했다. 근무 당시 코엑스 건물과 아셈타워 두 곳의 전기 시설 유지 및 관리를 담당했다. 이런 경력이 쌓여 현재 세종기지 전기설비대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상 작업 능력’도 갖췄다. 안진현 대원은 해군에서 군 복무 중 문무대왕함에서 함정 생활을 한 경험을 갖고 있다. 문무대왕함은 소말리아 해역에서 대한민국 국적의 선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구축함이다. 군 전역 이후엔 다른 상선도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조선소부터 수출선까지 해양·선박 관련 업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안진현 대원은 “고등학생 시절 막연하게 배를 타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해군에 지원한 후 승선의 매력에 푹 빠졌다”며 “이후 자동차 수입수출, LNG, 해저케이블 설치선 등의 갑판 선원으로 근무하며 오세아니아를 제외한 모든 대륙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긍정적이고 도전 정신이 넘치는 안진현 대원이지만 남극 생활에 대해선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남극의 아름다운 풍경, 모험을 막연히 생각하고 지원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1년이라는 긴 시간의 체류, 위험한 환경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진현 대원은 “월동대원 지원자들은 남극이라는 매력적인 장소를 기대하기 전, 생각보다 체류 기간이 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제38차 월동대 역시 이 긴 시간 동안 사건·사고 없이, 아무도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웃으며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 박설민 기자, 김두완 기자
관련기사
- [국가대표 극지인⑩] 나는야 남극 세종기지 ‘맥가이버’
- [국가대표 극지인⑨] 세종기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유지반장’
- [국가대표 극지인⑧] “남극의 별빛, 월동대원의 특권이죠”
- [국가대표 극지인⑦] “남극 기후변화, 바다 깊은 곳에 답이 있어요”
- [국가대표 극지인⑥] 남극의 지치지 않는 ‘긍정 배터리’
- [국가대표 극지인⑤] “지구는 간빙기 시대… 일반적 사이클 아냐”
- [국가대표 극지인④] “남극의 내일 날씨가 제일 궁금해요”
- [국가대표 극지인③] “내 꿈의 종착지는 아들과 함께 남극행”
- [국가대표 극지인②] 남극 세종기지에는 ‘살림남’이 살고 있다
- [국가대표 극지인①] “나는 남극 세종기지 월동대 대장이다”
- [국가대표 극지인⑫] ‘남극의 엔진’ 지키는 조력자의 하루
- [국가대표 극지인⑬] 변화무쌍 남극 바다, 바다 사나이가 접수하다
- [국가대표 극지인⑭] ‘조금’ 더 바쁜 중장비대원의 하루
- [국가대표 극지인⑮] 굴삭기와 기타가 그리는 ‘남극의 선율’
- [국가대표 극지인⑯] 남극과 세상을 잇는 ‘어린왕자’
- [국가대표 극지인⑰] 지구의 끝, ‘남극병원 24시’
- [국가대표 극지인⑱] ‘남극 셰프’의 얼음 위 따뜻한 한 끼
- ‘세상의 끝’ 극지 의사들이 일하는 방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