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대한극지의학회 학술대회’ 현장 ①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남극과 북극, 지구 끝단의 ‘극지(極地)’는 그 어떤 지역보다 의료 지원이 절실한 공간이다. 추위와 날카로운 얼음, 야생동물 등 위험요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때문에 극지 연구원들은 늘 부상의 위험을 안고 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한 극지 의료대원도 필수 인원이다.
살을 에는 추위와 고립된 극지 환경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건 단 한 명의 의사다. 매년 극지연구소는 남극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 기지 월동연구대, 아라온호 의료대원을 파견한다. 이들은 평범한 의사가 아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한 대원들이다. 또한 부족한 물자, 지원에서도 최선의 의료행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소명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극지 의료대원들은 현장에서 어떤 업무를 하게 될까. 극한의 극지 환경을 마주한 의료대원들이 느끼는 한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제 16회 대한극지의학회 학술대회’에 참가한 전문가들을 통해 들어봤다.
◇ 극한의 극지 환경을 지키는 1명의 의료인
“남극의 의사로서 생활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하지만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극지 환경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성규 전문의는 18일 ‘제16회 대한극지의학회(KSPM) 학술대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극지의학회는 지난 2014년 남·북극 극지를 파견 다녀온 극지 의사들이 설립한 단체다. 극지 파견 월동대와 연구자들의 건강과 응급상황 대응, 의학연구 및 지원 활동을 맡고 있다.
방성규 전문의는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 의료대원이다. 지난해 11월 세종기지로 파견해 현재 남극 킹조지섬에서 근무 중이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의학부터 한의학 의료 자격증을 모두 보유한 ‘스페셜 리스트’로 불린다.
방성규 대원에 따르면 12월부터 9월까지 약 10개월의 시간 동안 세종기지에서 발생한 환자는 총 264명이다.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 것은 12월로 60명의 환자가 의무실을 방문했다. 하계연구대가 기지를 방문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하계대가 없는 월부터는 월별 10명대로 환자수가 급감했다.
남극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환자 유형은 ‘내과’였다. 주로 소화불량과 호흡기 질환 환자들이 발생했다. 두 번째로 많은 유형은 ‘정형’으로 근육통과 염좌 증상 환자가 많았다. 또한 열상 및 찰과상 등 외과 환자도 매달 2~5명 정도 발생했다. 남극의 거친 환경, 중장비를 사용하는 원동연구대 임무 특성상 크고 작은 부상의 위협이 늘 따라다닌다는 방증이다.
남극과 북극을 오가는 쇄빙선 ‘아라온호’에서도 극지 의사들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아라온호 선의로 근무한 민선영 전문의에 따르면 선박 특성상 가장 많이 발생하는 환자 유형은 ‘멀미’다. 이어서는 감기 등 감염 질환과 만성 기침, 위염, 역류성 식도염 등 내과성 질환이 주를 이뤘다. 미세 골절 및 요통 등 외과·정형외과적 부상 환자도 종종 발생한다고 말했다.
민선영 전문의는 “근로 계약상 업무 시간은 주 40시간으로 돼 있지만 배 위에서 환자가 발생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아라온호 선의는 일주일 내내 근무를 해야해 상당히 체력적으로 고됐다”고 말했다.
극지 의사들은 월동대, 연구원들만을 돕는 것이 아니다. 인근 지역 기지 인원의 지원도 맡는다. 실제로 지난 5월 세종기지에서 해상 50km 떨어진 캐나다 연구선에서는 충수돌기염 의심 환자가 발생하자 방성규 대원 측에 수술 가능 여부를 문의하기도 했다. 다만 킹조지섬 인근에서는 초음파 등 1차 진단은 가능하지만 수술이 불가해 푼타아레나스로의 후송을 조언했다고 한다.
세종기지 극지 의사들은 연구원뿐만 아니라 원양어선 등 인원들의 지원도 맡는다. 실제로 방성규 대원은 최근 세종기지 인근 지역에서 조업 중인 동원 원양어선 선원 진료 지원 요청을 받은 바 있다.
지난 7월 새벽, 동원사의 원양어선에서 뇌출혈 혹은 뇌경색으로 의심되는 환자가 발생했다. 이에 어선 측에선 방성규 대원에게 세종기지 내에서 1차 진료가 가능한지 문의했다. 이에 방성규 대원은 의료 인프라 부족으로 진료 자체는 어려우나 칠레 공군기지를 이용, 푼타아레나스로 후송하는 것을 추천했다.
◇ 물자도, 장비도 부족한 극지 의사들
이처럼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극지 환경에서 극지 의사들은 생명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대들보같은 존재다. 하지만 극지 의사들이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자원도, 지원도, 물자도 모두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향후 펼쳐질 ‘북극항로시대’에서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선 극지의료계의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극지 의료 환경은 열악하다. 특히 원활하지 못한 ‘약품’의 공급은 극지 의사들을 괴롭히는 고질적 문제다. 실제로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방문한 당시, 감기약, 타이레놀, 두통약, 진통제 등 상비약품은 유통기한이 몇 개월 지난 것들도 많았다. 약이 유통기한이 지난다고 썩는 것은 아니지만 약효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방성규 대원은 “세종기지와 같은 극지 호나경에서는 의약품과 같은 자원이 늘 부족하다”며 “그래도 올해부터는 극지의약품 및 의료소모품 표준화사업이 시행돼 발주 의약품이 조금 더 체계되면서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약품뿐만 아니라 의료장비도 지원이 부족하다. 현재 세종기지가 보유한 의료장비는 X-선 촬영장비, 외과용 간이 수술 시설 정도가 전부다. 만약 기지활동 중 큰 부상이 발생할 경우, 이를 대처할 방법이 사실상 전무하다. 인근 칠레공군기지를 통해 푼타아레나스 병원으로 후송할 수밖에 없다.
취재팀이 세종기지를 방문할 당시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한 바 있다. 지난해 12월 하계대 연구원 한명이 넘어지는 외과 부상이 발생했다. 당시 방성규 대원은 X-레이 촬영을 했지만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때문에 칠레로 후송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다행히 원격의료시스템으로 한국 내 병원과 소통해 기지 내 진단 조치가 이뤄졌다. 이 덕분에 연구원은 무사히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또한 환자 진료와 멀미, 극한 환경에 시달리는 아라온호 선의들에겐 또 다른 고민이 있다. 입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민선영 전문의의 설명에 따르면 아라온호 선의는 극지연구소 소속 직원이 아니다.
아라온호는 현재 해운업 사업체인 ‘STX’가 위탁운항한다. 이때 STX소속 승조원으로 아라온호 선의는 고용돼 탑승하게 된다. 즉, 일은 극지연구소 직원들과 하지만, 소속은 승조원이다. 때문에 의료와 관련해 복잡한 상황이나 법적 문제가 발생할 시 선의가 보호받기에 상당히 어려운 실정이다.
민선영 전문의는 ”아라온에서 의사의 역할은 굉장히 입지가 모호한데 실제로 계약을 승조원이랑 같이 하기 때문“이라며 ” 약간 소외가 될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사실 보호를 못 받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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