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세종과학기지 우재호 제38차 월동연구대 생물대원 인터뷰
생물데이터 수집부터 기지 내 수질 관리 등 임무 수행… ‘운동 코치’로도 활약
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얼음만 가득한 불모지처럼 보이지만 ‘남극’은 수많은 생명의 보고다. 국제 ‘남극조약체제(ATS: Antarctic Treaty System)’에 따르면 현재 등재된 남극생물종은 8,806종이다. 아직 미발견·미등록된 종은 1만7,000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전 세계 과학자들은 아직 여러 비밀을 간직한 극지 생물 연구를 위해 매년 남극을 찾는다.
한국에서는 ‘남극세종과학기지’가 이와 관련된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기지가 위치한 ‘킹조지섬(King George Island)’은 펭귄부터 물범, 바닷새, 지의류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남극의 번화가’다. 이에 남극특별취재팀은 세종기지에서 생물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제38차 월동연구대 우재호 대원을 만났다.
◇ 쉴 틈 없는 ‘남극 에너자이저’, 남극 생물 모니터링 책임
지난해 12월, 취재팀은 남극 킹조지섬 바톤반도에 위치한 ‘포터소만(Potter cove)’을 찾았다. 극지연구소 소속 하계연구대 야생동물팀의 연구 현장을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검은색 운동복을 입은 월동대원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하계대 안전 및 활동 지원을 위해동행한 우재호 월동대원이었다.
연구팀과 함께 이동한 포터소만의 지형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날카롭게 깎인 바위와 자갈, 미끄러운 얼음, 높은 경사는 연구자들과 취재팀을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종기지의 ‘에너자이저’라는 별명답게 우재호 대원은 그 험난한 길을 쉬지 않고 이동하며 길을 안내했다. 동시에 연구팀과 취재팀의 안전도 틈틈이 살폈다.
우재호 대원은 “월동대는 세종기지를 지키는 역할도 하지만 과학자분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라며 “남극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 많아 월동대원이 하계대 분들의 안전을 위해 항상 지원에 나선다”고 말했다.
하계대 지원도 지원이지만 우재호 대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생물대원’으로의 역할이다. 월동대 생물대원은 세종기지 주변 생태계 모니터링 및 생물 데이터 수집이 주업무다. 특히 하절기(여름철)에는 기지 인근의 지의류(균류와 조류가 공동체를 이룬 식물 무리), 토양 미생물 분석 등을 위한 시료 채취, 채취 장비 관리 및 유지·보수 업무가 필수다.
이처럼 세종기지가 남극생물연구에 집중하는 이유는 과학적·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남극생물상(antarcticbiota)은 극한 환경, 인간 문명과의 접촉이 거의 없어 새로운 진화 방향성을 보여준다. 때문에 항암물질, 신소재, 신약물질 개발 등에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남극생물 중 하나인 ‘크릴새우’ 관련 바이오 시장 규모는 2033년 48억1,770만 달러(약 7조원) 규모에 달할 전망이다. 또한 지난 3일 극지연구소-경희대 공동연구팀은 세종기지 인근 바다에서 채집한 홍조류 ‘커디에아 라코빗자에’에서 복합 다당제(CRP)라는 신물질을 추출했다. 이는 차세대 이차전지 성능을 극대화하는데 사용 가능하다.
아울러 남극 내 ‘조류인플루엔자(AI)’ 등 질병 확산 연구 지원 및 관리도 생물대원이 담당한다. 지난해 12월 하계대 연구팀은 죽은 스쿠아(갈색도둑갈매기)의 분변에서 AI바이러스 의심사례를 발견했다. 이에 우재호 대원과 연구팀은 시료를 수집·분석한 후 한국으로 전달했다.
우재호 대원은 “생물대원은 여러 연구 프로젝트를 위한 생물 데이터 수집 역할, 조류 인플루엔자 모니터링, 외래종 유입 방지 관리 등 임무를 수행한다”며 “특히 조류 인플루엔자의 경우 단계별 대응방안이 있는데 킹조지섬 바톤반도에서 고위험군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 기지 내 수질 관리도 담당… 정화조 및 정수기 샘플 채집 후 분석
하계대 지원을 마친 후 기지로 복귀했지만 우재호 대원에게 쉴 틈은 없었다. 곧바로 플라스틱 물병과 비커, 시험관 등을 들고 ‘정화조’로 이동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 소음이 울리는 정화조에서 우재호 대원은 버려진 오·폐수 샘플을 채취했다.
남극생물연구뿐만 아니라 기지의 ‘생활용수’ 성분 관리도 생물대원의 몫이다. 세종기지에서 일평균 발생하는 오수의 양은 3.6~10톤이다. 해당 오·폐수는 정화조에서 정화한 후 남극 바다로 방류된다. 이때 배출되는 오·폐수는 국제남극조약에 따라 성분 관리가 필요하다.
이에 생물대원은 오·폐수 샘플을 채취한 후 정밀 분석을 거쳐 정화조가 잘 작동하는지, 오염물질 방류는 기준치를 넘지 않는지를 관리한다. 주요 평가 기준은 ‘용존산소량(DO)’과 ‘생물 화학적 산소 요구량(BOD)’, ‘화학적 산소 요구량(COD)’ 등이다.
우재호 대원은 “남극의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선 철저한 오·폐수 정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며 “월동대와 하계대가 물을 사용하고 버린 후 정화한 물의 방류 기준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생물대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대원들이 마시는 물의 위생도 생물대원이 관리한다. 세종기지에서 사용되는 물은 기지 인근의 ‘현대호’에서 공급받는다. 이는 백두봉, 세종봉 인근의 빙하가 녹은 물이다. 빙하에는 오래된 바이러스와 미생물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이를 정화해 사용하기 위해 생물대원은 물의 ‘산성도(pH)’, ‘대장균’ 수치를 측정한다.
우재호 대원은 “세종기지에서 사용하는 물의 원천은 현대호의 빙하가 녹은 물인데 산성화는 됐지만 큰 문제는 없다”며 “하지만 빙하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깨끗이 정화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 ‘크로스핏’과의 인연, ‘남극 PT 담당’ 역할도
숨가쁜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찾아온 휴식시간, 우재호 대원은 기지 뒷편 창고로 이동했다. 이곳은 세종기지의 ‘헬스장’이었다. 러닝머신부터 바벨, 덤벨, 케틀벨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헬스장을 연상케 하는 운동기구가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루 일과의 마무리로 운동을 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특히 ‘크로스핏(CrossFit)’은 우재호 대원이 가장 사랑하는 운동이다. 크로스핏은 여러 종목의 고·중강도의 운동을 번갈아 가며 훈련하는 운동법이다. 세종기지에 오기 전 크로스핏 체육관 코치로 활동한 이력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세종기지의 에너자이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우재호 대원이 크로스핏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선배들과 농구 시합에서 더 잘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선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크로스핏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다. 첫 운동은 정말 힘들었지만 ‘살아있음’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는 것이 우재호 대원의 말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튼튼한 체력과 건강을 자부하던 우재호 대원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밤샘과 스트레스 등 대학원 생활로 생긴 피로 누적으로 인해 건강이 조금씩 망가진 것이다. 특히 ‘저밀도콜레스테롤(LDL)’ 수치가 급격히 올라갔다. 이에 건강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눈에 띈 것이 바로 세종기지 월동대였다.
우재호 대원은 “누구보다 건강하다 자부심을 가졌는데도 건강이 망가지자 지금 가는 길이 나의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떻게 하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세종기지 월동대 지원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됐고, 이번에 월동대에 합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우재호 대원은 세종기지의 ‘퍼스널 트레이너’ 역할도 맡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월동대원들과 함께하는 운동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연령대, 성별, 운동수행능력이 다른 대원들의 특성에 맞춰 운동 스케줄도 관리하는 중이라고 한다.
우재호 대원은 “월동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인도네시아부터 시작해서 남미, 유럽을 방문하면서 어떤 삶이 잘사는 삶인지, 만나는 한 분 한 분에게 물어보고 싶다”며 “이에 대한 해답을 세계 여행을 하면서 찾는 것이 월동 이후의 꿈”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극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의 생활을 글로 남겨보고 싶다”며 “미지의 땅에서 찾은 도전의 이유를 주제로 책 한 권을 써보는 것이 1년 간의 목표”라고 전했다.
/ 박설민 기자, 김두완 기자
관련기사
- 남극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신’ 이야기
- [국가대표 극지인⑤] “지구는 간빙기 시대… 일반적 사이클 아냐”
- [남극 연구자들⑤] “가장 작은 생명에 기후변화가 담겨있어요”
- [국가대표 극지인④] “남극의 내일 날씨가 제일 궁금해요”
- “남극 지킬 국가대표 극지인 찾습니다”
- [남극 연구자들④] “기후위기에서도 생명은 길을 찾죠”
- [남극 연구자들③] “펭귄의 작은 행동에도 기후변화가 담겼죠”
- [국가대표 극지인③] “내 꿈의 종착지는 아들과 함께 남극행”
- [남극 연구자들②-2] “펭귄에 물려도 남극에 온 이유는요”
- [남극 연구자들②-1] 남극을 녹이는 열정, ‘펭귄팀 3인방’
- [국가대표 극지인②] 남극 세종기지에는 ‘살림남’이 살고 있다
- [남극 연구자들①] “우주의 비밀, 남극서 가장 가까이 들리죠”
- [국가대표 극지인①] “나는 남극 세종기지 월동대 대장이다”
- [인터뷰] “남극의 얼음, 젊은 과학도 가슴에 불을 질렀죠”
- [국가대표 극지인⑦] “남극 기후변화, 바다 깊은 곳에 답이 있어요”
- [국가대표 극지인⑧] “남극의 별빛, 월동대원의 특권이죠”
- [국가대표 극지인⑨] 세종기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유지반장’
- [국가대표 극지인⑩] 나는야 남극 세종기지 ‘맥가이버’
- [국가대표 극지인⑪] “남극의 추위, ‘짜릿한’ 즐거움이죠”
- [국가대표 극지인⑫] ‘남극의 엔진’ 지키는 조력자의 하루
- [국가대표 극지인⑬] 변화무쌍 남극 바다, 바다 사나이가 접수하다
- [국가대표 극지인⑭] ‘조금’ 더 바쁜 중장비대원의 하루
- [국가대표 극지인⑮] 굴삭기와 기타가 그리는 ‘남극의 선율’
- [국가대표 극지인⑯] 남극과 세상을 잇는 ‘어린왕자’
- [국가대표 극지인⑰] 지구의 끝, ‘남극병원 24시’
- [국가대표 극지인⑱] ‘남극 셰프’의 얼음 위 따뜻한 한 끼
- ‘세상의 끝’ 극지 의사들이 일하는 방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