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서예진 기자 국회가 23일 초과 생산 쌀 시장격리(정부매입)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야권은 여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안 처리를 강행했다. ‘수적 열세’인 국민의힘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이에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할 방침이다. 이제 칼자루는 윤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윤 대통령은 몇 차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시사한 바 있다 .
◇ 야당 주도로 양곡관리법이 통과한 배경
국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고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재석 266인 중 찬성 169인, 반대 90인, 기권 7인으로 통과시켰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수요 대비 3~5% 이상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이상 하락할 경우 정부 매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만 개정안 시행 이후 벼 재배 면적이 증가할 경우 매입 의무화 요건이 충족돼도 매입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지난해 10월 19일 더불어민주당은 쌀 수요량 초과가 생산량의 3%를 넘거나 가격이 평년의 5% 이상 내렸을 때 정부 매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단독 통과시켰다. 하지만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이 위원장인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통과하지 못하자, 민주당 소속 농해수위 위원들은 국회법에 따라 지난해 12월 28일 해당 법안을 본회의에 직회부했다.
정부여당이 거세게 반발하자 김진표 국회의장은 중재에 나섰다. 초과 생산량 규정을 3~5% 이상으로, 가격 하락 폭을 5~8% 이상으로 조정하는 중재안을 내놨다. 김 의장은 지난 2월 27일 민주당 직회부 안건을 직권으로 미룬 후 여야 합의를 촉구했다. 그러나 국민의힘과 정부는 의무 매입 전제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김 의장은 지난 20일 여야 원내지도부를 불러 최후 교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무 매입이 있는 한 저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고,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만 기다리며 중재안이나 타협을 전혀 구상하지 않는 정부여당”이라며 23일 본회의 처리를 못박았다.
야당은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 쌀 과잉생산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쌀 초과 생산을 인지했음에도 제때 대처하지 않아 쌀 가격이 폭락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쌀 생산량을 조절해 필요한 양만큼 생산하고, 나머지는 콩, 밀, 가루쌀 등 전략작물직불제로 돌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양곡관리법이 통과되면 국가 식량안보 확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면 정부여당은 쌀 매입이 의무화되면 과잉생산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과잉생산이 계속되면 쌀 가격이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정부가 쌀 초과 생산량을 의무 매입하면 농가들이 벼농사에 천착해 다른 작물을 재배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쌀농사는 기계화율이 90%가 넘지만, 다른 밭작물은 기계화율이 60%에 머무른 상황이어서 양곡관리법이 개정되면 농가에서 손쉬운 벼농사만 고집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 거부권 행사하면 여야 극한대치 예상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당정은 양곡관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또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이날 양곡관리법 개정안 통과 직후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법률안에 대한 재의 요구안’(거부권)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도 여러 차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에둘러 밝힌 바 있다. 다만 법안이 통과된 이날 대통령실은 “법률개정안이 정부에 이송되면, 각계의 우려를 포함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히 숙고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며칠 말미를 두고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헌법 53조에 따르면,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은 정부에 이송돼 15일 이내 대통령이 공포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15일 이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회로 다시 보내진 법안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할 수 있다. 즉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윤 대통령이 거부하면, 더 까다로운 표결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다.
현행 헌법 체제 하에서 대통령 거부권은 노태우 전 대통령 7번,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0번, 노무현 전 대통령 6번 사용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1번, 박근혜 전 대통령은 2번 거부권을 행사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단 한 차례도 행사하지 않았다.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았다.
민주당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더라도, 재의를 위해서는 현재 의석수(169석)보다 더 많은 표를 확보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전체 재적 의원이 출석했을 경우, 재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찬성 200표가 필요한 상황이다. 재의를 통과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을 경우 또 한 차례의 정국 경색이 예상된다. 현재 여야 관계, 그리고 야당과 대통령실의 관계가 최악인 상황이라지만 더욱 극한 대치로 흘러갈 수 있다는 의미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을 당시, 야당은 의사일정 중단을 선언하는 등 정국이 급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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